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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얼을 면면히 이어가는 함양 ‘학사루’5. 비운의 학사루
  • 이철우 본지 회장
  • 승인 2024.04.03 10:34
  • 호수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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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루의 시판철거라는 작은 사건이 복수심으로 꽉 찬 인성을 가진 사람에 의해 사화라는 태풍과 같은 커다란 결과로 만들어졌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학사루의 시판에 대해 김종직이 관대했더라면, 사가들이 조의제문을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크나큰 역사의 소용돌이는 일지 않았을까.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했던 변화의 전말을 탐구하는 것이 사가(史家)의 몫이다.

함양 학사루(學士樓)는 조선시대 각 고을의 태수가 집무하는 읍성 안에 있던 객사 옆 누각으로 빈객이나 선비들이 모여서 풍류를 즐기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김종직 선생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를 내리도록 한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1498)로 이어진 슬픈 사연이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됐다. <사진: 함양군>

함양군청 앞에 학사루(學士樓)가 있다. 이 학사루는 역사의 한 지점을 이루는 주요 건물이다.

함양초등학교 본관이 있는 자리는 고려·조선시대 고을의 관사인 함양 객사가 있던 곳이다. 객사는 그 지역을 방문한 외부 귀빈이 머무르는 숙소로 16칸 건물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 지역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 해당한다. 일반 서민 여행객이야 주막집에서 국밥이나 먹으면서 머물렀지만, 고급 관료나 귀빈은 시설이 훌륭한 객사에서 여장을 푸는 것이 조선시대의 풍습이었다.

객사 옆에는 학사루가 있었다. 학사루는 조선시대 각 고을의 태수가 집무하는 읍성 안에 있던 객사 옆 누각으로 빈객이나 선비들이 모여서 풍류를 즐기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함양초등 정문 자리는 객사 전면으로 중문이 있었고 그 앞에는 읍성의 남문인 함화루(咸化樓)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함양읍성인 위성을 신식 건물로 개축 시 군청의 동편을 함양보통학교로 만들면서 객사와 학사루에 벽과 창문을 만들어 4개의 교실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1960년대 말 학교 건물들이 목재로 된 낡은 건물로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콘크리트 건물로 교체가 이루어졌다. 함양초등학교도 1970년경 객사 건물을 헐고 10개 교실을 2층으로 개축하였다. 이때 객사 건물을 뜯고 짓자는 의견과 객사를 보존하고 뒤의 목조를 헐고 짓자는 의견으로 양분되어 논쟁이 있었으나 철거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당시 함양 유지들은 이 객사를 상림이나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하였으나 군청과 교육청에서는 예산이 없다며 거절하여 철거하였는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철거 시 상량문에 350년의 역사를 가진 건물임을 알 수 있었다. 전국의 현존하는 객사 건물로는 전주객사(1471년), 거제객사(1489년), 무장객사(1581년), 밀양객사(1652년), 부여객사(1704년), 선성현객사(1712년), 낙안객사(1722년), 완도객사(1722년) 등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국가에서 보존하고 있다. 함양도 몇 년만 기다렸으면 보존의 기회가 있었는데 소멸하고 말았다. 상림 함화루는 위성의 남문이었으나 상림으로 옮겼기에 지금 남아있다.

학사루 앞에 만개한 배롱나무꽃. <사진: 함양군>

학사루는 계속 교실로 이용되다가 신축 교실이 지어지면서 1960년대에는 군립도서관으로 용도가 바뀌어 사용되었다. 필자가 중학생 시절 도서관장은 김철서(전 함양군 바르게살기협의회장)였다. 1980년대에 현 위치로 이전 복원하는 과정에서 남향이던 것을 동향으로 잘못 지었다.

학사루의 역사는 설치장소를 옮겨야 했고 누각에 걸린 유자광의 시의 액자를 불태운 것이 빌미가 되어 후에 무오사화로까지 이어진 슬픈 사연을 품고 있다.

유자광은 얼자 출신으로 고모 댁이 있는 함양군에 놀러 왔다가 시를 짓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벽에 걸게 하였다. 김종직이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를 보고 “자광이 어떤 자인데 감히 학사루에 현판을 걸었는가” 하며 떼어내 불태우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자광은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당시 성종의 용단으로 김종직의 문하생인 영남 출신의 유림들이 대거 기용되어 이극돈·유자광 등 훈구파와 맞서 신진세력을 이룩하자, 훈구파는 세력 유지에 불안을 느꼈다. 연산군 4년(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에 김일손이 사초에 그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것을 기화로 세조의 찬위에 대한 비유라고 연산군을 충동질하여 마침내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에 스스로 옥사를 다스리고 문인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뒷받침으로 김종직 문하의 사림을 제거했다. 만고에 남을 불후의 문장이 대역죄로 논죄 되는 피바람 부는 사필(史筆)에 관련된 옥사였다. 김종직의 무덤을 파서 부관참시하고 그의 제자들인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학파를 일망타진하였다. 함양에는 정여창, 표연말 등이 화를 입었다. 이때 유자광은 숭록대부에 승진했다. 또 1506년 중종반정 때에 성희안과의 인연으로 의거에 참여, 정국공신(靖國功臣) 일등으로 무령 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대간·홍문관·예문관의 탄핵으로 훈작을 빼앗기고 평해(平海: 경상북도 울진)에 유배되었다가 몇 번의 유배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병을 얻어 실명을 했고 중종 7년(1512년) 73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함양 유림들이 학사루 느티나무 당산제를 지내는 모습. <사진: 함양군>

학사루의 시판철거라는 작은 사건이 복수심으로 꽉 찬 인성을 가진 사람에 의해 사화라는 태풍과 같은 커다란 결과로 만들어졌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학사루의 시판에 대해 김종직이 관대했더라면, 사가들이 조의제문을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크나큰 역사의 소용돌이는 일지 않았을까.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했던 변화의 전말을 탐구하는 것이 사가(史家)의 몫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건넜지만, 카이사르의 행동만이 역사적 사실로 회자되는 것은 이전에 강을 건넌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카이사르의 행위만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현재 함양초등학교 오른쪽에 5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김종직이 5살 난 아들이 죽자, 함양군을 떠날 때 아들에 대한 기억을 추억하기 위해 심은 나무이다. 느티나무 아래 숙직실이 있었는데 비가 오는 밤이면 아이 우는 소리가 나서 숙직 교사는 겁이 나 느티나무 밑 숙직실에 자지 못하고 옆의 교장 사택에 가서 지냈다는 경험담을 100세를 넘게 사신 이지순 선생님이 들려준 함양초등교사 시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철우 본지 회장  lc34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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