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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청포묵
배정희 수필가.

서울 사는 딸네 집에 갔다가 근처 시장에 들렀을 때다. 청포묵이 눈에 띄자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장바구니에 담아 넣었다.

청포묵과의 인연의 친정 오빠 결혼식에서다. 결혼식 마치고 하객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데 요즘처럼 뷔페가 아니었다. 예식장 인근 식당에서 갈비탕과 술안주를 곁들인 음식을 손님에게 접대하던 시절이다. 어머니는 식당보다는 집으로 손님을 모셨다. 평소에도 손맛 좋기로 소문이 난 어머니는 손님들에게 내놓을 음식 재료를 하나하나 직접 챙기셨다. 메뉴로는 곰탕과 수육, 잡채, 떡 외 탕평채를 준비하셨다.

그 시절에 탕평채는 무척 생소한 음식이었다. 탕평채의 주재료는 청포묵이다. 물에 불린 녹두를 맷돌이나 분쇄기에 곱게 갈아 가라앉힌 앙금으로 청포묵을 쑤는 것부터가 손이 많이 간다. 하얗고 탱글탱글한 청포묵에 밑간을 하고 갈은 소고기는 갖은양념으로 재어 놓았다가 볶는다. 붉은색 당근과 파란색 미나리를 데치고 계란은 얇게 황백지단을 부쳐 색감을 살리는 것이 포인트다.

준비한 재료를 접시에 소복이 담아 구운 김을 얹어 내어놓으면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돋아 절로 손이 갔다. 부들부들한 청포묵과 아삭아삭 씹히는 야채와 달큼한 고기 맛에 인기 최고였다. 재료 하나하나 정성스레 담아내는 수고스러움에 주방 일거리는 늘었어도 결혼식 축제 분위기를 더해주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스무 살에 결혼한 어머니는 스물한 살에 오빠를 낳았다. 오빠가 장가갈 때도 여전히 어머니는 젊고 고왔다. 아버지가 동네 양복점을 운영하실 때 보조로 함께 일하면서 가정을 돌봐야 했기에 늘 아등바등 살아야 했다. 그 시절 힘든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에게 어린 자식들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업종을 바꿔 시작한 장사는 어머니의 깔끔함과 부지런함으로 크게 번창했다. 주말이면 밀어닥치는 손님들로 계산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직장 다니는 내게 계산이라도 도와달라고 독촉할 정도였다. 새벽에 시작된 장사가 자정이 다 되도록 끝나지 않는 힘든 노동이었지만 어머니의 앞치마는 돼지저금통처럼 불룩했다. 생각해보면 그즈음이 우리나라 경제 성장기였고, 그 시기에 시작한 장사가 어머니의 황금기를 만들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사랑하던 맏아들의 결혼식이 있던 날, 어머니는 그간 도움을 받은 주변 분들을 초대하여 정성 가득한 음식으로나마 아낌없이 성의를 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많고 많은 음식 중에서도 탕평채가 유독 눈에 띄었고 추억과 그리움의 음식으로 남아있다. 그날 점심부터 저녁 늦도록 우리 집은 손님들로 북적거렸고 모처럼 어머니의 웃음소리와 흥겨운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탕평채는 조선 영조의 탕평책을 상징하는 궁중요리다. 여러 당파가 잘 협력하자는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에 처음으로 올라온 음식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그런 뜻을 알고 탕평채를 준비하진 않으셨을 것이다. 나에게 탕평채는 어머니의 젊은 시절과 어머니의 전성시대를 떠오르게 하는 음식이다. 나의 우상은 어머니였다. 늘씬한 키에 이목구비 뚜렷하고 누구에게나 당당하면서 이해심과 배려가 많으신 어머니셨다. 누구든 집에 방문하면 따뜻한 밥 한 상을 먼저 차려내 주시던 정 많고 따스했던 어머니….

시장에서 사 온 청포묵으로 탕평채를 만들어 본다. 어머니처럼 격식에 맞게 차려내진 못하고 내 나름대로 요리한다. 도톰하게 썬 청포묵에 당근과 피망과 버섯을 채 썰어 김가루 솔솔 얹은 탕평채를 바라보며 그 시절 환하게 웃으시던 내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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