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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계 선생의 사적이 있는 태양빛이 많은 곳 ‘대광마을’7. 뇌계 유호인과 유봉실

대광마을에서 왼쪽으로 대병마을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뇌계 유호인의 묘소가 있는 유봉실로 불리는 대광마을에 속하는 ‘바깥 대광’이라 부르는 지금은 없어진 독가촌이 있던 곳이 있다. ‘바깥 대광’은 1968년 ‘울진 삼척지구 공비침투사건’ 이후 인근의 화전민 8가구를 모아 인위적으로 마을을 형성한 곳이다. 유봉실 출신 박병도 시인은 그림 그리듯 고향마을을 노래했다.

함양군 병곡면 대광마을은 지대가 높아 전망이 아주 좋은 마을이다. 유봉실 출신 박병도 시인은 그림 그리듯 고향마을을 노래했다. <사진: 서부경남신문>

대광마을은 대봉산 천왕봉 아래 병곡면 동북간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지대가 높아 전망이 아주 좋은 마을이다. 대광마을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갈래다. 지대가 높고 정남향으로 자리 잡아 태양을 제일 많이 받는다는 뜻에서 대광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설과 함께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대광사라는 절이 있어 절 이름을 따서 정했다는 설이 있다.

이 마을의 흠은 산간오지로 교통이 아주 불편하고 고지대라 물이 귀하다.

정주 조건의 첫째는 물이 풍부해야 한다. 풍부한 물은 주민을 돕는다는 풍수제민(豐水濟民)과 물은 생명을 기르는 뿌리라는 양명근(養命根)이란 말처럼 마을이 번성하려면 물이 풍부해야 한다. 더욱이 대광마을은 지형이 자라형국이라 마을이 쭉쭉 뻗어 나가려면 자라가 물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식수원 댐이나 소류지 등 물을 가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마을이 해결해야 할 우선적인 과제는 물 문제라고 하겠다. 최근에는 공기 좋고 전망이 좋다고 귀촌하는 사람도 있다.

조선 전기시대 문인으로 유명한 뇌계 유호인 선생 사당. <사진: 서부경남신문>

대광마을에서 왼쪽으로 대병마을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뇌계 유호인의 묘소가 있는 유봉실로 불리는 대광마을에 속하는 ‘바깥 대광’이라 부르는 지금은 없어진 독가촌이 있던 곳이 있다.

‘바깥 대광’은 1968년 ‘울진 삼척지구 공비침투사건’ 이후 인근의 화전민 8가구를 모아 인위적으로 마을을 형성한 곳이다. 유봉실 출신 박병도 시인은 그림 그리듯 고향마을을 노래했다.

먹고 살길 없어
찾아들었던 이곳이었는데
이웃이라고는 그저 보이는 산과 나무와 풀들
그리고는 어딘가에서 살았는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에 모였다
또 어느 한순간에 흩어져 떠났고
주인 없는 집에서 흘러간 세월만 거목으로 남아 있었다

뇌계 유호인 선생은 함양 출신으로 조선조 9대 성종임금 때의 학자요 대문장가로서 명성이 높다. 뇌계는 세종 27년(1445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가성부락에서 태어나 상림과 연해있는 대덕리 죽장마을로 옮겨 살았다. 죽장마을 도덕바위 옆의 뇌계공원에 뇌계 선생의 사적비가 있다.

뇌계는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총명함을 보였다. 세조 8년(1462년) 17세의 나이로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에 급제하였다. 뇌계 집안은 유교 전통을 지닌 양반 가문이었으나 사는 형편은 그리 넉넉지 못했던 것 같다. 첩첩산중 함양 오지에서 훌륭한 스승도 모시지 못하고 수십 년을 노력해도 어려운 향시를 당년에 두 분야에 합격한 것이다. 성종 2년(1471년) 영남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로 칭송이 자자하던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26세의 뇌계가 김종직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우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1474년(성종 5년) 점필재 선생에게 사사한지 불과 2년여에 대과에 급제한 뇌계는 홍문관 수찬에 올랐다. 뇌계는 그의 재능을 아끼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선비들도 그를 사랑하였고 당시의 대제학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은 그를 추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독서하도록 하였다. 그곳에서 뇌계는 더욱 학문에 매진하여 거목으로 성장해갔던 것이다.

성종은 뇌계의 학문을 아끼고 그의 시문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그의 충성심과 효심에 감복하여 항시 곁에서 왕을 보좌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뇌계는 부모님 봉양을 위해 내직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부모님과 가까운 외직을 원해 고향 가까운 고을로 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양모하직(良母下直)의 사임소(辭任疏)가 받아들이는 게 법도였다.

이렇게 하여 뇌계는 홍문관 수찬 - 거창군수 - 홍문관 교리 - 의성현감 - 사헌부 장령 - 합천군수로 내·외직을 맡았다. 성종임금은 뇌계를 외직으로 보내기 아쉬워 전별연을 베풀고 친히 술을 권하며 단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있으렴 부디 갈따 아니 가든 못할 소냐
무단히 네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애닯구나 가는 뜻을 일러라.”

뇌계는 합천군수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1494년(성종 25년) 50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뇌계는 충효와 청렴·검소하여 가세가 청빈하였다. 부의금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묘비는 후임군수인 어득강(魚得江)이 손수 써서 세워주었다.

뇌계 묘에는 풍수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뇌계 상을 당하자 뇌계를 총애하던 성종임금은 좋은 자리를 잡아 영면토록 하라며 국풍의 지관을 보내 장례를 돕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사생관은 사람이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속의 뼈에 남는다고 보았다. 이른바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말도 이런 이치에서 나온 말이다.

대광마을에서 대병마을로 연결되는 곳에 세워진 뇌계 선생 사적비. <사진: 서부경남신문>

뼈가 묻히는 묫자리는 백이 남아서 거주하는 집이 되기 때문에 ‘음택(陰宅)’이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음택 자리를 잡아준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관은 한양에서 먼 길을 오면서 산천경개를 두루 구경하며 천천히 움직이는데 상주 측은 먼 길을 빨리 가자며 독촉만 하여 심사가 틀어졌는지 묘의 좌향을 슬며시 돌려놓았을 뿐 아니라 뱀설이라 아래턱 부분에 닿게 얕게 파야 힘을 받을 곳임에도 뱀의 목 부위에 해당하는 부분까지 깊게 파서 힘을 쓰지 못하게 매장하였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함양지역에 뇌계 후손들은 6가구에 지나지 않으며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도 없는 등 번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뇌계는 관직에서 당상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지만 명신록(名臣錄)에 충효와 시문과 필력이 뛰어나 당대의 삼절(三絶)이라 일컬었다. 그가 남긴 작품은 시 883수와 산문이 36편으로 모두 919수가 있다. 뇌계는 명현임에도 함양의 서원에 모신 곳이 없다. 다행히 전북 장수군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모셔져 있다. 함양에서 너무 소홀히 대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뇌계 선생의 명성에 걸맞게 사적지를 찾아서 가꾸어 나갈 필요가 있다. 뇌계공원에서 뇌계 묘소가 있는 유봉실을 잇는 뇌계 길을 꽃과 뇌계의 시로 단장하여 둘레길로 활용하면 군민들의 건강과 정서 함양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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