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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과 마당이 만들어 내는 공간들의 변화 ‘일두 고택’8. 좌안동 우함양의 유래
  • 이철우 본지 회장
  • 승인 2024.05.04 12:29
  • 호수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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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갓난 아이가 위대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는 데는 교육의 힘이 크다. 그래서 훌륭한 선생 한 분이 삼정승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우리 함양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함양태수로 오셔서 유호인, 표연말, 임대동,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등 유수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를 계기로 함양은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일두 고택은 옛날 완월관풍(玩月觀風)하던 선비의 넓은 서정을 느낄 수 있다. <사진: 함양군>

어떤 기자가 독일 콜 총리에게 물었다. ‘수상’께서 태어나신 고향에서 위대하고 유명하신 사람이 태어난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내가 알기로는 단지 작은 갓난 아이들만 태어났습니다.”

작은 갓난 아이가 위대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는 데는 교육의 힘이 크다. 그래서 훌륭한 선생 한 분이 삼정승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우리 함양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함양태수로 오셔서 유호인, 표연말, 임대동,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등 유수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를 계기로 함양은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광해군 2년(1610년) 팔도 유림의 공의(公議)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이 다섯 분을 동방오현이라 일컫는데, 그중 정여창과 김굉필이 김종직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다. 조광조를 뺀 네 분은 공교롭게도 모두 영남 출신이었다. 영남 출신 사현 가운데 김굉필과 이언적은 출신 지역이나 강학(講學)을 한 지역에서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정여창과 이황에 비해 덜하였다. 후에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지역은 안동과 함양이다. 안동은 퇴계 이황(1501~1570)의 고향이고, 함양은 일두 정여창(1450~1504)의 고향이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에 안동, 서쪽에 함양이 있기 때문에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일두 선생의 본관은 하동이다. 함길도병마우후(咸吉道兵馬虞候) 을육(乙六)의 아들로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서하면 봉전리에 하향하여 있던 정종대왕의 후손인 도평군의 딸과 결혼하여 2남 4녀를 두었다.

8세 때 의주판관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수행하니 명나라 사신 장영(張寧)이 보고 집안을 창성하게 할 인물이라 하여 여창(汝昌)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세조 11년 이시애 난으로 부친이 전사하매 유해를 찾아 예장(禮葬)하니 세조가 을육의 공을 가상히 여겨 여창으로 하여금 부직(父職)을 잇게 했으나 고사하였다. 후에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 김일손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성종 14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종 21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 안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문인(門人)이라 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종생하였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는 부관 참시되었다. 성리학의 대가로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역행실천(力行實踐)을 위한 공부에 집중했다. 왕학주소(庸學註疎), 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진수잡서(進修雜書)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모두 소각하여 지금은 김굉필의 외증손인 정구(鄭逑, 1543~1620)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속에 유집(遺集)이 전할 뿐이다. 중종 2년에 도승지, 중종 12년에 우의정, 광해군 2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조 8년에 문헌공이라 시호(諡號)하고 광해군 2년에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함양 남계서원, 거창 도산서원, 합천 이연서원, 나주의 경현서원, 상주의 도남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개평 마을은 함양읍에서 국도 24호선을 따라 안의 방향으로 10분쯤 가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지곡면 소재지에 있는 마을이다. 주위에 펼쳐지는 수려한 산들과 넉넉한 들로 둘러싸인 마을에 교회가 보이고 학교가 있다.

마을 초입에 있는 방앗간 옆으로 난 골목을 돌아들면 왼편으로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마을로 들어가는 기분이 썩 좋다. 마을 건너 동대(東臺)의 노송들이 마치 병풍을 쳐 놓은 듯 줄지어 있다. 오른쪽 개평교회 앞쪽의 길을 계속 걷다 보면 푸르게 이끼 낀 고풍스러운 규모가 큰 기와집들이 줄지어 눈에 보인다. 마을에 들어갈수록 고풍스러운 맛을 더한다. 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은 산에서 떠온 작은 돌을 박석처럼 깔아 운치를 더해준다.

마을 중앙쯤에 3천여 평의 넓은 대지에 자리 잡은 선생의 고택이 나타난다. 솟을대문에는 효자충신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정려패(旌閭牌)인 홍패가 5개나 높이 걸려 있다. 그중 맨 위의 것은 효자통정대부판전농시사정복주지문(孝子通政大夫判典農侍事鄭復周之門)이라 쓰여 있다. 대대로 효자와 충신을 배출한 영남 으뜸의 명문대가임을 알려주고 있다. 옆 돌담에 기대어 있는 안내판에는 ‘국가지정문화재 정병호 가옥’이라 적혀 있다.

대문에 들어서면 높은 축대 위에 사랑채가 나타난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앞뒤로 툇마루가 붙어있는 겹집이며, 누마루가 사랑방 앞에 높이 달린 ㄱ자형 평면이다. 일반 사대부집의 전형적인 남향 배치와는 달리 남향한 안채 앞을 막아서듯 사랑채가 동향한 것이 특이하다. 누마루에 오르면 바로 앞마당에 동산처럼 꾸며놓은 석가산(石假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흐드러진 노송이 힘껏 용트림하듯 엉켜있고 여러 괴석들이 호석처럼 둘러져 있으며 키 작은 나무들이 간간이 심어져 있어 마치 작은 숲을 보는듯하다.

시선을 멀리 주면 마을과 산이 시원스레 보여 그 옛날 완월관풍(玩月觀風) 하던 선비의 넓은 서정을 느낄 수 있다. 누마루 천장에는 탁청제(濯淸霽)라는 편액이, 사랑대청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편액이 걸려있고 온돌방 바깥벽 위에는 크고 힘찬 필체로 충효절의(忠孝節義)라고 쓰여 있어 대문에서 느꼈던 이 집의 기품을 느끼게 하였다.

일두 고택은 문간채, 사랑채, 행랑채, 안채, 사당, 고방채, 별당채 등을 각기 딸린 마당과 함께 적절히 배치하고 있다. 3000평이 넘는 넓은 대지임에도 영역별로 나누어진 각 부분들이 샛담으로 구획되어 있어 그리 큰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각 영역은 완전히 구분되지 않고 각 모서리 부문을 튀어 서로 연결되는 개방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사랑마당에서 안채로 들어서면 중문 너머로 작은 마당이 있다. 이는 대문에서의 출입 방향을 안채로 꺾어주는 교통공간이면서 시선을 자연스레 받아주고 또한 차단하는 여유 공간이다. 그리고 남자가 쓰는 사랑마당과 안주인의 안마당을 이어주면서도 완충시켜주는 중간영역이고 지대가 낮은 사랑채 부분과 그보다 넓은 안채 부분의 높이 변화를 자연스레 받아주며 연결하는 다목적 공간인 것이다. 또한 보기에도 훌륭하니 실용성과 아름다움이 하나 된 공간이다. 현대 주택의 설계에도 기꺼이 응용할 수 있는 멋들어진 전통공간 구성기법이다.

이 공간을 지나 행랑채 끝에 난 문을 통하면 안마당이 된다. 안마당은 안채와 서쪽의 아래채,행랑채, 고방(곳간) 등으로 둘러싸여 장방형을 이루고 안채로 출입하는 징검돌을 경계로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단출한 구조인 아래채와 안채, 광으로 둘러싸인 마당 서쪽 부분에는 우물과 돌확이 있다. 안채의 부엌이 이에 면해, 안살림에 관계된 설비들이 모두 모여 있는 명실공히 여성의 공간이 되고 있다.

안마당에 들어서면 여느 양반집의 안채에서 느끼지 못하는 정겨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는 소담스럽게 가꾼 화단은 물론이고 안마당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공간이 리드미컬하게 연결되는 탓도 있겠지만 오래된 가옥으로 크게만 지은 근세 한옥과는 달리 건물 각 부분의 치수가 어딘가 우리 몸의 치수와 어울려 아담한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래전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연속극 ‘토지’의 촬영장소로 쓰였을 게다.

함양을 찾은 관광객들이 일두 고택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함양군>

한편 별당채는 안채·행랑채·사랑채로 둘러싸여 있으며 화단이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사랑마당의 격식 있는 가산(假山)과는 달리 작은 괴석과 석물, 소탑, 갖은 화초들로 꾸며내고 있다. 그 옆의 굴뚝과 더불어 한옥의 정경을 한껏 더해준다.

이 주택에서 눈여겨볼 것의 하나는 안채와 별채 사이의 연결문이다. 여자의 일생을 보는 것 같음을 느낄 수 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안방마님으로 대접받고 실권을 행사하지만, 남편이 죽으면 안채를 며느리에게 넘겨주고 별당채로 물러나 노마님으로 살아가게 된다. 별당에서 안채로 가는 문은 안채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열 수 없게 되어있다.

일두 고택을 구경한 사람들은 누구나 여러 채의 한옥과 그에 딸린 마당들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공간들의 변화와 표정에 감탄하게 된다. 여러 마당과 한옥들이 만나기도 하고 다시 나뉘면서 사람의 움직임과 눈의 흐름을 잡아주기도 하고 또한 자연스레 이끌기도 한다. 일두 고택은 유난히 햇볕이 잘 들어 밝고 나지막한 안채 마루에 앉아 있노라면 포근한 분위기가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어 사람들을 마냥 붙들어 두는 안마당을 지닌 기품 있는 집이다.

감동을 주는 것도 하나의 산업이 된 요즘, 이렇게 뜻깊은 감동을 준다면 다음 번에 또 찾아오고 싶지 않을까. 무엇인가를 꼭 팔아야 산업이 아니다.

이철우 본지 회장  lc34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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