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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 전기특선이 가장 먼저 들어온 동네 ‘지곡 개평’9. 함양역사의 발원지
  • 이철우 본지 회장
  • 승인 2024.06.25 13:26
  • 호수 138
  • 댓글 0

개평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좌강 안동, 우강 함양”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훌륭한 유학자를 많이 배출한 함양의 중심이다. 개평은 돌담길이 잘 가꾸어져 있다. 비바람을 견뎌온 담벼락에는 역사가 세월의 이끼처럼 끼어있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 한옥단지. <사진: 함양군>

내가 학교 다닐 때 3, 4월의 교실은 썰렁했다. 예산 부족으로 난방을 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면 우르르 교실 밖으로 몰려나가 양지바른 교실 벽에 쭈욱 붙어 서서 햇볕을 쬐며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하루는 개평 사는 정명상 친구가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했다.

“함양에서 전기특선이 가장 먼저 들어 온 동네가 어딘 줄 아나?”

“물어보나 마나 함양읍이지?”

“아니야, 지곡 개평이야.”

“정말이가?”

삼천포화력발전소에서 보낸 전기는 수동 변전소를 통해 개평을 거쳐 함양읍에 공급되었다. 수동에서 함양읍으로 바로 연결하면 될 것을, 개평 사람들의 위세에 눌려 개평을 둘러 연결했다.

특선은 온종일 불이 들어오고, 일반선은 오후 6시경부터 밤 11시 30분경까지만 들어왔다. 통금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면 일반선 전기는 꺼졌다.

70년대 초반까지 시골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들기름 담은 종짓잔에 실로 꼰 심지로 불 밝히거나 석유 등잔을 사용하였다. 어떤 집은 큰방과 작은방 사이 벽에 구멍을 뚫어 구멍에 등잔불을 올려놓곤 하였다. 불은 어두워 가까이 있는 사람의 얼굴을 겨우 식별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일반선일망정 전기 혜택을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지덕지해 하던 시절인데 특선 전기를 이야기하는 개평이 부러웠다.

개평마을 일두 정여창 고택을 찾은 관광객들.

개평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좌강 안동, 우강 함양”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훌륭한 유학자를 많이 배출한 함양의 중심이다. 개평은 돌담길이 잘 가꾸어져 있다. 비바람을 견뎌온 담벼락에는 역사가 세월의 이끼처럼 끼어있다.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만나게 된다. 제천댁, 직각댁, 관찰사댁 등 어디서 들어본 듯한 귀에 익은 택호(宅號)가 있는 집들이다. 일두 고택, 오담 고택, 풍천노씨 종가댁, 노참판댁 등은 문화재로 지정된 고가들이다.

함양은 인구 4만에도 못 미치는 작은 도시로 풍천 노(盧), 진주 강(姜), 하동 정(鄭)씨가 대성을 이루고 사는 소규모 ‘노-강-정 씨족사회라고 할 수 있다. 개평은 노·강·정 중에서 함양에 사는 노씨·정씨의 시조들이 모두 개평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노씨· 정씨의 집성촌이다.

조선시대는 사대부의 시대였다. 사대부(士大夫)는 사(士)와 대부(大夫)의 합친 말이다. 물러나면 사(士)이고 나아가면 대부(大夫)이다. 사대부라면 누구나 사(士)의 능력을 기르고 대부(大夫)가 되어 경륜을 펴보고자 했다. 조선시대 500년을 통해 개평 마을에서만 과거 급제자가 수십 명이 배출되었다. 인물이 인물을 낳은 것이다. 이는 급제자 본인의 자질과 부모들 노력의 열매라 할 수 있겠다. 개평 사람들은 ‘일 선생이 삼정승보다 귀하다(三政丞 不如一先生)’는 생각을 갖고 좋은 스승을 모셔 자녀교육에 힘썼다. 오늘날 서울 강남 8학군처럼 교육열이 대단했다고나 할까. 벼슬과 권력이 말을 하던 사대부의 시대에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한 개평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은 당연지사. 반세기 전 만해도 서울 사람 가운데 함양은 몰라도 개평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

봄이 되면서 마을이 생기를 찾고 있다. 나무들이 칙칙한 색깔을 벗고 산뜻한 연초록빛으로 채색되고 있다. 마을을 찾는 화사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아침이면 옥같이 맑은 개울 따라 물안개가 남쪽으로 흐른다. 마을 앞 개울은 판서를 역임한 옥계 노진 선생의 호를 따서 옥계천이라 부른다. 옥계천 건너 동대라고 불리는 언덕의 소나무들은 문화재로 지정받을 만큼 수령이 오래되었다. 소나무 숲과 연결된 논둑길은 일두 선생이 긴 담뱃대 물고 거닐던 산책로이다. 일두 선생은 동방오현의 한 분으로 개평을 말하면 바늘에 딸린 실처럼 말하게 된다.

선조들의 피와 정신은 후손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마을 후손 중에는 정병조 영문학자를 비롯하여 대학교수가 100여 명이라고 한다. 바둑계의 거목 노근영, 노량진 수산시장 대표 노영환, 국회의원 정준현, 1961년부터 20년간 붙박이처럼 지곡면장을 지낸 정운상도 이곳 출신이다.

함양은 소득사업으로 곶감을 많이 생산한다. 곶감 만드는 법은 손으로 매만져 하얗게 분을 내는 전통방식과 분을 내지 않고 밝은 빛깔이 나게 하는 현대적 방법이 있다. 이 마을의 노우영, 이재도 옹은 공정이 까다롭고 손길을 많이 필요로 하는 전통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반세기 동안 감을 만져온 두 분은 전통기법의 맥이 끊어질까 염려하고 있다. 부녀회에서 기름을 사용하지 않고 옛날 방식의 자갈과 모래를 사용하여 만드는 한과도 유명하다.

마을에 들어서면 교회가 먼저 눈에 띈다. 역사가 백 년이 된 오래된 교회다. 어느 곳보다 유교 사상이 강한 마을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개평교회는 한국기독교사에서 무시 못 할 위상을 갖고 있다. 이 교회 출신 목사인 정순행 고신 총회장, 김병원 고신대 총장, 허순길 고신대학원장 등 3명이 동시에 중책을 맡아 고신 계열의 대들보 역할을 한때가 있었다.

일두 정여창 탄신기념일 행사 모습.

경남 하동의 박경리 토지문학관이나 산청의 동의보감촌이 주목을 받는 것은 드라마 덕분이다. 개평은 풍부한 문화 콘텐츠를 갖고 있다. 좋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데다가 인기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쓴 언어의 연금술사 노희경 등 개평 출신 드라마 작가도 있다.

값진 문화유산을 물려받아 잘 활용하는 것은 선조에 대한 예의요 후손 된 도리가 아닐까? 역사는 단절된 과거의 이야기에 그쳐서는 안 되고 오늘과 내일로 이어져야 한다. 군수로서 추진하지 못한 아쉬운 사업 중의 하나가 함양과 개평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를 만들지 못한 일이다. 이 일을 위해 노희경 작가와 몇 번 논의하던 중이었음을 밝혀둔다.

개평은 오래전 학생 시절 전기특선이 먼저 들어왔다며 자랑하고 뽐내던 친구의 고향 동네다. 특선은 일반선과 뭔가 다르다. 개평이 품고 있는 소중한 유산이 지역 문화 창달을 위한 특선 역할을 해줄 날이 머지않은 것으로 확신한다.

이철우 본지 회장  lc34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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