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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묘 참배행사’로 성씨에 대한 자긍심 높혀야10. 노강정과 오여박
  • 이철우 본지 회장
  • 승인 2024.06.25 13:58
  • 호수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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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 대성을 이루는 성씨는 흔히 노·강·정이라 하여 풍천 노(盧)씨, 진주 강(姜)씨, 하동 정(鄭)씨를 일컫는다. 왕대밭에 왕대 나고 설대밭에 설대 난다고 노강정의 자손은 번창하여 지곡을 중심으로 함양골 구석구석에 퍼져 살고 있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한옥마을<사진:함양군>

함양군은 1읍 10면으로 서울 면적(605.2㎞)의 1.2배인 725.45㎞에 4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널찍하게 살아가고 있다. 인구의 성씨 분포는 다양하다. 그 중에서 함양에 대성을 이루는 성씨는 흔히 노·강·정이라 하여 풍천 노(盧)씨, 진주 강(姜)씨, 하동 정(鄭)씨를 일컫는다. 입향(入鄕) 순서는 하동 정씨, 풍천 노씨, 진주 강씨 순이고, 인구 수는 강씨, 노씨, 정씨 순인데 왜 노강정이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왕대밭에 왕대 나고 설대밭에 설대 난다고 노강정의 자손은 번창하여 지곡을 중심으로 함양골 구석구석에 퍼져 살고 있다.

하동 정씨의 입향조는 정지의(鄭之義)선생이다. 고려 충목왕 때 밀직부사 국룡(國龍)의 5세손인 정지의 公이 풍수지리설의 좋은 자리를 찾아 하동에서 지곡면 개평리에 이거(移居)하였다고 한다. 개평(介坪)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다. 물론 구전되는 이야기다. 개평은 마을 앞뒤로 개울이 흐르고, 두 개울은 마을 입구에서 합수된다. 개울에 끼여 있는 평지라는 뜻에서 끼일 개(介), 넓을 평(坪)자를 써서 개평(介坪)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지형이 대나무 잎 네 개가 붙어있는 개(介)자 형상이라 개평이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설명은 개평은 높은 곳에서 보면 여자 자궁처럼 생겼다고 한다. 선비는 “추워도 춥다고 하지 않고 흔들린다고 한다.”는 말처럼 점잖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 이름을 지형에 맞는 품위 있고 세련된 이름을 찾다가 개평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자궁처럼 생겼기에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몇 군데 우물이 있다. 일두 선생을 비롯하여 후손이 번창하여 대성을 이루고 있다. 함양하면 개평이고 개평하면 일두 정여창 선생을 들먹인다. 하동정씨는 인물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풍천 노씨의 함양 입향조는 노숙동(盧叔仝, 1403~1463) 선생이다. 公은 조선조 세종 때 진사 김점(金點)의 딸과 결혼하여 창원에서 지곡면 개평으로 옮겨 살게 되었으니 함양의 노씨 있음은 公에게 비롯되었다. 김점의 장인은 일두 정여창의 조부이신 정복주(鄭復周)로 노숙동은 일두의 고모부이다.

노숙동이 함양으로 이주하게 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김진사가 사랑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꿈속에 개평 동네 앞 동대 소나무 밑에 큰 황룡이 자고 있더란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하인을 시켜 동대에 누가 있는지 정중히 모셔오라고 일렀다. 하인이 동대에 가보니, 소년이 자고 있어서 김진사의 분부로 모시러 왔노라 하고 소년을 김진사 댁으로 모셨다. 김진사가 살펴보니 소년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고 영특해 보였다. 소년은 창원에서 서울로 과거를 보러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김진사가 후히 대접하고 내려올 때 다시 한번 들르라고 하였다. 소년은 과거에 급제하고 김진사 댁의 사위가 되어 개평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송재 노숙동(松齋 盧叔仝)은 세종 9년(142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문종을 섬겼고 충청도·경기도·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청렴결백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었다. 태종 3년(1403년)에 태어나 세조 9년(1463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1세다. 묘는 지곡면 공배리 부야마을 동쪽 언덕에 있다. 후손으로 옥계 노진 선생이 우뚝하다.

함양의 진양 강씨(晉州 姜氏)는 금제 강한(琴齊 姜漢)선생에서 비롯되었다. 선생의 아버지 이경은 적개공신(敵愾功臣) 남이(南怡) 장군으로 더불어 화를 입었다. 이에 선생의 어머니는 강보에 싸인 선생을 안고 함양으로 이거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출중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16세 때 이웃 사람의 상소문을 대필해준 인연으로 성종을 배알하게 되었다. 임금은 선생의 재주를 가상하게 여겨 선생의 부친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연산군 2년(1496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관료의 길에 들어 지례(知禮)·고산(高山) 두 고을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휴천면 목현에 살다가 자모를 여윈 후 벼슬에 뜻이 없어 산청 문필봉 아래로 옮겨 거주하였다.

그는 아름다운 수석(水石)의 경관을 사랑하여 서재 아래에 명옥탄(鳴玉灘)이란 정원을 만들어 벗과 더불어 시를 짓곤 하였다. 당시 본도의 방백이던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이 찾아와 시 한 수를 남겼다.

두류산색 읊는 창(窓)속이오
명옥의 여울 소리 취한 베개 사이로다
스스로 임천에 즐거운 세월이 있고
다시는 진세(塵世)에 나가려는 혼몽(魂夢)이 없도다.

함양에는 오여박(吳呂朴)이라고 부르는 관향을 함양으로 하는 토성(土姓)인 吳氏,呂氏,朴氏가 있다. 토성 가운데 관료를 배출하여 사족(士族)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그 가계는 함양을 떠나 수도권이나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게 된다. 사족으로 성장하지 못한 가계도 혼인 관계 등 여러 요인으로 함양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분화해간 결과 본관지인 함양을 비롯하여 경향 각지에 세거지를 두게 되었다. 함양군 지역 인구에서 노강정과 달리 오여박 3성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 않고 후예들도 지역에 크게 번창하지 못하고 있다.

풍천노씨의 함양 입향조인 송재 노숙동 선생의 고택.<사진: 함양군>

함양 오씨의 시조로 삼는 오광휘(吳光輝) 장군은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회동에 살았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를 지내고, 고려 명종 때에 문반(文班)에서 무반(武班)으로 옮겨 무인이 되었다. 왜적과 거란군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워 정3품 무관인 상장군이 되어 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회동(晦洞)마을에 재실이 있다. 오씨들은 외지로 떠나고 함양에 뿌리박고 사는 이는 많지 않다. 회동에서 물 건너 있는 산청군 생초면 하둔마을에 함양오씨 재실(齋室) 추사재(追思齋)가 잘 관리되고 있다. 하둔마을은 한집 건너 판·검사 나고 두집 건너 교수·박사가 난다는 인물이 많이 나는 마을이다. 그 마을에 함양오씨 후손들이 번창했던 모양이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 함양에 거주하고 있는 함양오씨는 72가구 176명이다.

함양 여씨의 입향조는 여림청(呂林淸) 장군이다. 여림청 장군은 함양여씨의 시조인 여어매(呂御梅)의 2세로 당나라 때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 헌강왕 3년(877년)에 신라에 귀화하였다고 한다. 여림청은 고려 중기에 진국대장군(종2품)으로서 무공을 세워 함양부원군에 봉해지면서 함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여림청 대장군은 휴천면 임호마을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임호마을은 처음에는 여림청(呂林淸)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여림청은 바로 여림청 장군을 지칭한 것이다. 그의 묘소 역시 임호마을에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비명이 새겨진 신도비가 있고 재실이 신축되어 있다. 재실 뒤로는 시조 여어매(呂御梅)의 무덤이 있고 그 아래에 아들인 여림청의 무덤이 있다.

2015면 인구조사에서 전국에 3만4835명이고 함양군에는 5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함양여씨 중 성좌처럼 특출한 인물은 몽양 여운형이 있고 함양지역에는 여규상 대한노인회 함양군 지부장, 여운보 전 함양보건소장, 여재영 판사 등이 있다.

함양박씨는 신라 경명왕의 셋째 아들인 박언신(朴彦信)을 시조로 하고 고려시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진 박선(朴善)을 중시조로 한다. 함양박씨 입향조 박선의 묘와 재실인 영명재가 함양읍 남산에 있다. 박선의 묘는 괘등혈(掛登穴)로 등잔 밑이 어두워 멀리 떨어져야 밝은 것처럼 자손들이 고향을 떠나야 잘 산다는 속설이 있다. 대구 갑을그룹의 창업주가 함양박씨이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 함양박씨는 전국적으로 38만788가구에 163만690명이고 함양군에 57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함양군에서는 함양 토성인 오여박의 대종회와 연계하여 성지순례와 조상숭배 사상을 고취하도록 매년 상하반기 ‘시조묘 참배 행사’를 추진하면 성씨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고 방문객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이철우 본지 회장  lc34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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