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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비의 진실, 후대에서 ‘역사는 말한다’14. 선정비와 악정비

이철우 본지 회장
승인 2024.08.21 17:08
호수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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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선정비를 세우려 해도 끝내 사양한 목민관도 있다. 안의 현감을 지낸 연암 박지원이 그 한 사례다. 연암은 백성들의 구휼에 힘써 궁민을 없애고 베틀과 물레방아를 제작하여 보급했는가 하면 노인 위안잔치를 베풀고 열녀함양박씨전을 저술하여 풍속을 규율하는 등 행정가, 문장가, 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기는 선정을 베풀었지만, 본인의 만류로 선정비가 세워지지 않았다. 선정비를 세울 경우 그 비용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부담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개혁은 사회제도 및 정치체제의 본질적인 요소를 유지하면서 일부 불합리한 제도를 사회의 발전에 적합하게 변혁시키는 것을 말한다. 개혁이 기존의 체제나 추세와 조화를 이루면서 부분적이고 한정된 변혁을 꾀하는 것이다. 개혁은 기존체계 안에서 사회적 모순을 제거하는 것으로 기득권자의 저항이 크다. 사람들은 흔히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고려시대 최석은 양반계급과 권력층의 관습을 초월할 수 있었던 개혁가였다.

최석은 고려 충렬왕 때 순천부사를 지낸 청렴한 목민관이었다. 벼슬이 높아져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 무렵은 지방관이 이임 때 고을 사람들이 좋은 말 여덟 필을 선사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었는데 나중에는 이것이 민원의 소지가 되어 말썽이 많았다. 고을 사람들은 단지 풍습대로 여러 필의 말을 끌고 와 최석에게 고르라고 하였다. 청렴하기로 이름난 최석은 이를 극구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말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 말 여덟 필에 짐을 나누어 싣고 개경으로 올라갔다. 며칠 후 하인이 최석 앞으로 달려와 기쁜 듯이 말했다.

“나으리, 말이 열 필이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배가 불러있던 검은 말과 누런 말이 망아지를 낳았습니다.”최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게 참 잘 되었다. 그러잖아도 그 말들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도착했으니 이젠 돌려보내려고 하던 참이다. 그런데 그동안 새끼를 낳아 열 필을 돌려주게 되었으니 얼마나 면목이 서는 일이냐.”

최석이 새끼를 포함 열 마리의 말을 돌려준 것이 본보기가 되어 민원의 소지가 있던 팔마의 선물 폐회를 없애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팔마비가 선정비의 효시다. 이 이야기는 고려사 31권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지방에 가면 지역마다 수령을 지낸 사람들의 선정비가 많이 세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명칭도 다양하다. 송덕비, 공적비, 사적비, 불망비, 영모비 등이다. 이런 선정비는 지방민들이 선정을 베푼 수령이 떠날 때에 고마운 마음을 모아 세운 것이다.

토정 이지함은 아산 현감 때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장사도 시키고 기술도 가르쳐 생계로 삼도록 했다. 또 늙거나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짚신을 삼게 하여 그것을 내다 판돈으로 쌀을 사서 먹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고을 안의 거지들을 모아 생계 대책을 세워주고 구걸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선정으로 충남 아산의 영인면 사무소 뜰에 세워진 토정의 선정비에는 ‘이후지함인화영모비(李候之函仁化永慕碑)’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은 ‘이지함이 떠난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추모하기 위한 비’라는 뜻이다.

함양 상림은 비림(碑林)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상림 어귀에는 대원군 시절 설치한 척화비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공원 중심부에는 역대 군수들의 선정비를 모아 둔 인물공원이 있다. 그 곳에는 고부군수를 지내면서 배들평야에 물을 대는 동진강물을 만석보로 막아 물세를 받는 등 학정을 펴, 동학농민혁명의 계기가 된 조병갑의 선정비도 있다. 또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도 함양군수(재임연도에 대한 기록이 없다)를 지냈으며 “정사는 간편하고 공정하게 덕으로써 다스렸으며 태평성대를 누림으로써 길이 잊을 수 없다”는 영세불망비도 상림 비석군에 속해있다. 두 부자(父子)가 함양군수를 지냈는데, 함양군수 시절에는 선정을 베풀었는가 보다.

목민관 중에는 뻔뻔스럽게 재임 중 상부의 감사나 어사 등 감찰을 의식하여 영전을 노리고 손금 없는 유지들을 부추기어 급조한 자가발전의 선정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놀이 중에 비석차기라는 것이 있었다. 이 놀이는 바로 공덕비나 불망비같은 것을 돌로 차서 맞추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실제 선정을 베풀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비석을 만드는 것에 대한 백성들의 분풀이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선정비라기보다 악정비라 해야 맞을 것 같다.

선정비와 관련하여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 중에는 비록 풍자지만 유머와 해학이 엿보이는 것이 있다. “감사는 평안감사, 현감은 과천현감”이라 했다. 과천현감은 서울이 가까워 고관대작을 접촉하기 쉬웠다. 많은 세금 징수로 뇌물을 상납하면 좋은 자리로 영전하는 요직이었다. 서울로 떠나는 현감에게 아전들이 송덕비를 세우겠다며 비문에 쓸 내용을 물었다.

현감은 “알아서 쓰라”고만 하고 떠나는 날 비문을 보았다.

‘아니 오늘 도둑놈을 보내노라(今日送此盜)’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낯 두꺼운 현감은 껄껄 한번 웃고 망설임 없이 그 옆에 이렇게 적었다.

“내일 또 다른 도둑이 오리니(明日來他盜)”

현감이 떠나자 아전이 기가 막혀 또 한 줄 보태었다.

“도둑놈들만 끝없이 오는구나(此盜來不盡)”

선비가 지나가다 이를 보고 또 한 줄 보태어 썼다.

“세상이 모두 도둑놈뿐이구나(擧世皆爲盜)”

연암의 공적비는 본인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사후 200여 년이 되어 1986년 옛 안의현의 동헌이 있던 자리인 안의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명성을 좇아 달리는 자는 명성에 따라붙지 못하지만, 명성을 피해 달리는 자는 명성이 따라붙는다고 한다. 선정을 베푼 사람은 원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평가를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