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 소설가.

가을비가 잦다. ‘가을비는 장인 구레나룻 밑에서도 피한다’는 옛말이 무색하게시리 올가을은 폭우에 바람까지 동반해서 여기저기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여름 불가마처럼 끓던 폭염을 견디며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린 것은 비단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들녘 가득한 곡식과 야산의 과실나무들도 한여름 타는 목을 밤이슬로 축여가며 가을을 간절히 기다렸으리라. 그렇게나 기다리던 가을이 왔건만 잦은 비와 바람에 무참히 쓰러진 벼는 채 여물지 못한 채 수발아(이삭에서 낟알이 싹트는 현상)를 하거나 수확을 앞둔 과일은 절로 떨어져 농사꾼의 가슴에 멍이 들어간다.

오늘처럼 가을비 내리는 날이면 어느 분위기 좋은 찻집 창가에 앉아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 노랫말을 음미하며 창 밖 풍경을 감상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들판에 쓰러져 비를 맞고 있는 곡식과 맥아리 없이 떨어져버리는 감을 보니 그런 맘이 싹 사라져버린다.

나는 삼 년 전, 지리산 둘레길에서 숲길 안내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 안내소가 시천면 중태마을 한가운데 있어서 논밭으로 일 나가시는 마을어르신들과 매일같이 얼굴을 보며 얘기도 나누며 정이 들었다. 시천면과 그 일대는 고종시가 많이 나는데 고종시 곶감이 임금님 진상품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가을이 깊어지면 감나무에 조롱조롱 매달려 주홍빛으로 익어가는 감들로 마을 어귀에서부터 뒷산자락이 온통 발갛게 백열등을 밝힌 것처럼 환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지리산 둘레길 덕산과 위태 구간을 걷는 여행자들에게 귀한 풍경으로 박히곤 한다.

곶감농사가 이 마을 사람들의 생계 수단이 돼 버린 지는 오래다. 농사라는 게 농사꾼 마음대로 다 되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핸가, 곶감이 한창인 시기에 고온다습한 이상기온이 계속되어 애써 깎은 곶감에 곰팡이가 피어 대여섯 동의 곶감을 폐기처분한 농부도 있다. 곶감 100접을 ‘한 동’이라고 하니, 5~6만 개의 곶감을 땅에 파묻은 셈이다.

농부는 봄부터 여름 지나 가을까지 애지중지 감을 키워서 첫서리가 내리면 딴다. 지금이야 감 깎는 기계가 나와서 일손을 덜게 되었지만 그래도 곶감 만드는 일은 사람 손이 많이 간다. 곶감 만드는 철에는 마을 어르신들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다. 그해 곶감농사를 다 망치고 실의에 빠진 마을 어르신에게 무어라 위로를 해드릴 수가 없어 슬슬 피해 다녀야 했다. 하지만 이듬해 봄이 되자 마을 어르신들은 다시 감나무 아래 거름을 넣고 가지를 자르느라 새벽부터 분주했다.

복잡하기만 한 도시 생활을 접고 산골에 옮겨와 산 지 오년 째다. 산골에서 지내며 농부의 삶을 가만 들여다보노라면 가히 존경심이 밀려든다. 어느 해는 태풍으로, 어느 해는 병충해로, 또 어느 해는 이상고온으로 애써 지은 감을 땅에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결코 어떤 일에도 절망하거나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했다고나 할까.

어쩌면 삶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를 선택할 수 있기에 절망 앞에서 다시 힘을 낼 수 있다. 예측할 길 없는 저 하늘을 원망한들 부질없다는 듯 종일 가을비는 내리고 또 내린다. 집 뜰에 핀 해국이 빗물에 흠뻑 젖어 낯이 말갛다. 이 비 그치고 나면 햇살 속에 다투어 필 꽃망울들은 또 얼마나 눈부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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