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서 - 전 브니엘예술고등학교장

농작물은 정성으로 자라고

풀은 게으름으로 자란다

농사는 정직과 근면 가르치고

풀은 인내와 끈기를 가르친다

며칠 전, 대학동기들 몇 명이서 우리 집을 찾았다. 이 친구들 역시 모두 퇴직한 후, 부산에서 나름대로 각자의 일들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내가 퇴직 후 귀촌해 전원생활을 한다고 하니 나의 근황이 궁금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한 친구가, 귀촌 후 지금까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냐고 내게 물었다. 오래 생각 할 필요도 없이 ‘풀’이라고 대답했다.

4년 전, 이곳 지리산 인근의 야트막한 산자락 4000평을 처가 팔남매 중 다섯 가족이 공동으로 구입한 후, 택지로 조성하기 위해 토목공사에 들어갔다. 이때 산자락을 깎아내면서 생긴 흙의 처리문제가 여의치 않아, 택지 앞의 600여 평짜리 논을 추가로 구입한 후 그곳에 흙을 부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덕분에 육백 여 평짜리 논이 밭으로 변했다. 조성된 택지는 적당히 배분하여 각자가 집을 짓고, 집의 앞뒤로는 각자 텃밭을 만들고 농작물들을 심었다. 새로 생긴 600여 평의 밭은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하고, 고추와 가지를 심었다.

한, 두 달이 흐르면서 농작물들은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들을 맺기 시작했다. 모두의 손길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600여 평의 공동밭에 투자되는 시간은 점차 적어졌다. 개인의 텃밭에 비해, 공동의 밭은 마을의 앞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으니 아무래도 시선과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루는 가족들 모두가 공동밭에 모였는데, 고추와 가지는 병이 들었고 밭의 조성 시 덮었던 비닐과 부직포 사이로는 풀들이 삐져나와 무릎까지 자라있었다. 온 종일 약을 치고 풀을 멘 후, 앞으로는 잘해보자고 파이팅을 외쳤지만 그것도 잠시, 장마가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원위치가 되었다.

그 후 어느 날, 가족들이 다시 공동밭에 모였다. 그리고는 모두가 경악을 했다. 600여 평의 넓은 밭이 온통 풀들로 뒤덮였는데, 풀 사이로 겨우 보이는 고추와 가지들은 대부분 바닥에 떨어져 썩고 있었고 그나마 아직까지 달려 있는 것들도 모두 병이 들어 있었다. 풀은 얼마나 자랐는지 키는 사람의 목까지 올라왔고 줄기는 그 굵기가 손가락만 했다. 풀이 아니라 나무로 착각할 정도였다. 풀 한포기를 잡고 온힘을 다해 잡아당겨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풀 한포기 뽑는데 호미로는 아예 턱도 없고, 삽과 괭이로 몇 번씩이나 찍고 파서야 겨우 한포기를 파내었다. 모두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풀 뽑기를 포기했다. 밭에 심었던 농작물도 포기했다.

결국 농사라고는 처음인 자들이 농사를 우습게보았다는 것과 개인의 일은 열심이었지만 공동의 일은 등한시 했던 모두의 욕심을 반성하고, 당분간은 각자의 텃밭에서 몇 년간 농사일을 더 배우기로 했다. 공동밭은 그 동안 임대를 주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이 일로 인해 몇 가지의 교훈을 배웠다. 첫째, 단체생활에서는 개인의 일이 아닌 공동의 일을 우선시해야 해야 한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개인의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풀의 무서움이었다. 주위에 귀농이나 귀촌을 한 사람들이 있어 안부라도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풀과의 전쟁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3년간, 우리 부부는 우리의 텃밭에서 열심히 농사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정성을 다해 심고 가꾼 후 수확되는 농작물들은 마치 자식을 얻은 듯 큰 기쁨을 준다. 그러나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생기고 자라나는 풀들이다. 첫해의 공동밭 풀 사건을 생각하면 절대 풀 뽑기를 게을리 할 수 없다. 앞마당의 잔디밭, 집 앞뒤의 텃밭, 온갖 산채(山菜)들을 심어놓은 집 뒤의 얕은 언덕, 풀은 매일 뽑지 않으면 안 된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거나 한눈을 팔면 풀은 어느새 훌쩍 자라있다. 어쩌다 풀 뽑기에 지칠 때면 우습게도, 어서 겨울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겨울에는 풀이 없으니까.

귀촌 후 몇 번의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행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아내와 나는 걱정을 했다. “농작물들은 잘 자라고 있을까? 풀은 또 얼마나 자라 있을까?” 우리가 도대체 풀을 뽑기 위해서 귀촌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마음을 다시 바꾸어, 풀 뽑는 그 자체가 농사요 풀을 뽑아주는 만큼 열매를 더 얻는다고 생각하면 불평도 없어진다.

지금 나는 행복하다. 내 인생에서 처음 경험해 보는 농촌생활. 심는 대로 거두고 노력한 만큼 얻는다. 또한 도시에서만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삶과는 달리, 육체적 노동을 통해 직접 먹거리를 구하는 원초적 행위에서 나는 순수한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 그 동안의 짧은 텃밭 농사에서 나는 또 하나의 작은 교훈을 얻는다. 농작물은 정성으로 자라고, 풀은 게으름으로 자란다. 농사는 정직과 근면을 가르치고, 풀은 인내와 끈기를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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