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담. 시인 / 시집 <꽃이 아름다운 건 지기 때문이다> /한국출판문예진흥원 세종문학 나눔도서 선정.

엊그제가 입추(立秋)이더니 이제 저녁바람은 제법 선선한 게 한낮을 견뎌온 살갗에 부드러운 애무를 합니다. 봉당엔 맨드라미 봉숭아가 꽃불을 밝힙니다.

올봄은 비 한 방울이 그토록 그립더니, 여름은 심술궂은 장대비를 뿌렸고, 시도 없이 애기비 또한 줄창 내렸습니다. 아직은 여름 냄새가 빠지지 않은 가을이 곁에 왔지만 더듬어 지나온 유년의 기억 속 사진첩과는 풍경이 퍽 많이 변했습니다.

산은 푸름이 날로 장해져 왔지만, 강은 직선화되었고 갈대가 베어진 둑은 돌과 시멘트 옹벽 속에 갇혔습니다. 찬성과 반대라는 분열로 얼룩진 구호의 현수막이 어지러운 세상의 극명한 단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람천의 수달이 사람들의 돌팔매로부터 자유롭고, 고라니나 너구리가 자동차 바퀴아래 슬픈 눈으로 죽어가는 그런 세상에서 안도하는 그대와 우리가 원하는 생명평화의 세상은 이 계절 끄트머리와 첫머리에도 아직 보이지가 않습니다.

들녘은 뙤약볕아래 수확을 앞둔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고 뿌림과 가꿈의 내력을 아는지 들판은 온통 푸릅니다. 이 여름을 농부들은 장대 폭우와 모진 바람에 꿋꿋이 서있는 한 그루 장엄한 고목이었지요.

가훼(嘉卉) 아름다운 꽃. ‘곱사등이 춤’이라 시인 이월란이 노래합니다. “내가 춤을 추네 가슴 휘어꺽인 가훼 한 그루 등에 지고 갈마의 사슬 지으려 춤을 추네.”

그렇습니다. 농부는 가훼 그 아름다운 꽃을 가꾸기 위해 가인(嘉人)의 모습으로 이 여름을 이 계절을 이 땅의 변방에서 굵은 땀방울로 보냈습니다. 우뚝 선 고목으로 여린 싹들을 보듬으며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온 몸으로 싹을 틔워 생명의 끈을 잇는 풀, 한 알의 나락이든, 배추나 무, 푸성귀로 말하더라도 온전히 제 몸을 주는 무량의 보시. 가히 가훼라 하여도 제 품위를 낮추지 않는 생명의 풀이라 대접받을 만할 일이지요

또한 세상 생명들의 먹을거리를 가꾸고 지켜내는 일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물며 모두가 기피하고 박대하는 현실에 있어서야…. 그래도 요즘은 대처 생활을 접고 귀농자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점이 조금은 위안으로 삼을 만합니다.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무슨 꽃으로 피어 있어야 아름다운지 고민 같은 건 새삼 필요 없습니다. 꽃이 아니면, 이파리가 되든, 줄기가 되든, 뿌리가 된들, 그 어느 것 하난들 아름답지 않는 부분들이 있겠습니까? 참 많은 이야기를 안고 가는 여름을 배웅하고 가슴 뜨끈해지는 이유가 되는 가을을 맞습니다. 매년 오가는 손님이지만 해마다 느낌은 다릅니다.

가을이 저만치 옵니다. 뭐 서두를 일은 아니지만 오는 손님이니 참한 마음으로 마중해야지요.

서부경남신문  webmaster@seobunews.com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