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글쓰기 모임 '까르페디엠' 회원.

행복한 감정은 복병처럼 심연의 다리 밑에 있다가 기대치를 조금만 내려놓아도 언제나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처럼 굵은 빗방울이 내리는 날은 숲길을 드라이브하면 상쾌하다. 빗방울이 앞 유리창을 두둑두둑 때리고 와이퍼는 좌우로 부지런히 물을 쓸어낸다.

양쪽 숲에서 피어 오른 물안개가 평소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깜찍한 요정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신비한 기운이 감돈다. 도로는 빗물로 말끔히 씻겨 청결함을 주기까지 한다.

저수지 옆을 지날 때면 수면 위로 바쁘게 그려지는 수많은 원들과 튕겨나는 물방울들로 어지럽지만, 가슴은 그 물방울 수만큼이나 행복함으로 충만하다.

오래 전의 일이다, 사십 여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 여운이 살아있다. 낯선 마을의 골목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 집 담벼락 너머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에 걸음을 멈추었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에 삽입되었던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이었다.

당시 경음악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내한공연도 몇 번 가졌던 프랑스 폴모리아 악단이 연주하는 이 뜻밖의 선물이 우연히 만난 친구처럼 매우 반가웠다. 그 곡이 끝나고 다음곡인 ‘외로운 양치기’, ‘우울한 사랑’, ‘시인과 나’까지 다 듣고서야 발걸음을 옮겼고 걷는 내내 행복하였다.

지금도 영화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협주곡21번 음악만은 강하게 남아서 이 곡을 들을 때면 옛날 그 골목길에서 들었던 감동이 되살아나곤 한다.

작년에는 JTBC에서 방송된 남성 4중창단을 뽑는 ‘팬텀 싱어’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혼신을 다해 부르는 ‘크로스 오버’에 매료되며 행복한 기분에 빠졌었다. 올해 시작된 경연도 물론 열심히 시청하고 금요일 밤을 기다리며 행복한 감정에 빠지고 있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본지 20여년 되었지만 아직도 그 감동은 살아 있다. 광활한 사하라사막의 풍경에 압도당했고 주인공들이 나눴던 고전적인 사랑 또한 긴 여운을 남겼다. 잘 연출된 훌륭한 연기자들의 작품들은 많지만 이 작품이 주는 깊은 공감과 영상은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행복한 감정을 지속시키고 있다.

시골에 살게 되면 흑염소를 키우고 싶었다. 두 마리는 버거워 첫해에는 수놈 깜돌이를 분양받아 키웠다.

수컷이라 녀석은 덩치가 커감에 좀 사나워졌다. 옆으로 지나갈 때면 언제 습격당할지 몰라 녀석을 위협할 막대기가 필요하기까지 했다. 눈동자가 옆으로 길게 둥글어 보는 방향에 따라 흘겨보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을 깔보는 듯한 오만함까지 보였지만 귀여웠다.

새까만 털로 온몸을 무장하고 겨울에도 절대 추위를 몰랐다. 식성도 까다로워 아무거나 먹지 않아서 식량 대기에 힘들었지만 잎사귀를 들고 앞에 갖다 대면 입이 작아서 이파리를 한 장씩 따먹는 게 귀여워서 새 풀을 준비하면 한참 쭈그리고 앉아 녀석의 입에 가까이 대주곤 했었다. 숱이 많은 검은 털을 만지는 것도 느낌이 좋았다. 이렇게 동물을 키우는 것도, 텃밭에 채소를 가꾸는 것도 기쁨이 크다. 시골살이가 주는 행복함이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행복함이 따른다. 우연히 기차나 시외버스를 탔을 때 옆자리에 앉게 된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비밀스러운 속살까지 다 드러내 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소통에 이해와 신뢰가 느껴지고 급기야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은밀한 이야기까지 나누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아쉬움 속에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다시 연락하잔 약속도 없이 헤어질 때는 그렇게 오래 기억에 남을 줄은 몰랐다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가끔 생각해내며 연락처를 왜 묻지 않았는지를 후회하고 아름다운 만남이었다고 자위한다. 이런 아쉬운 기억을 남겨준 것에 아련한 행복함 같은 걸 가진다.

살다보면 가족들, 친구들, 이웃들이 주는 행복함도 많다. 특별히 자연이 주는 행복함은 위대하다.

인간은 행복할 권리를 다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오감을 열어놓고 있으면 행복은 의외로 많은데, 인간 자신이 닫아놓아 보지 못하고 놓치는 것이 많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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