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서 조각 공부하다
‘라벤더’와 만난 희열 잊지 못해
20년간 가슴에 품고 살아오다가
오십이 되어서야 직접 농사지어
아로마 향을 맡으면서 몸도 치유
이제는 축제도 열면서 함께 공유

이현숙씨가 4살 때 고향 산청을 떠나 오십이 되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 옛 서당 ‘학이재’의 모습.

산청에는 천백 명 회원을 자랑하는 목화장터 밴드가 있다. 그 회원들이 한 달에 한번 이집 저집을 돌아가며 같이 밥을 먹는 모꼬지모임이 있다. 이 모임에서 라벤더농장을 하는 이현숙님을 만났다. 외국 여행 때 보고 반했던 꽃인지라 나도 밭에 라벤더를 심었는데 겨울에 얼어 죽어서 우리나라에서는 라벤더가 자라기 어려운 줄 알았다. 그런데 라벤더 농장이라니 그 모습이 어떨지 엄청 궁금했다.

지난해 6월 3일부터 24일까지 학이재(學而齋) 축제가 열렸다. 주말 저녁마다 다양한 공연이 있었는데 나는 조용한 라벤더 밭을 보고 싶어서 한가한 오전에 찾아갔다. 라벤더 밭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뒤쪽의 울창한 대숲과 앞쪽에 유유히 흐르는 남강, 그 한가운데 고풍스런 한옥과 그 안의 라벤더 소품들은 절묘하게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라벤더를 증류해서 만든 라벤더워터를 그곳에서 처음 알았다. 나는 박하를 재배한다고 하니 학이재에 있는 증류기로 한번 증류해보라고 선뜻 제안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증류의 신세계를 알게 되었다.

이현숙님은 학이재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서울로 이사 갔다가 나이 오십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 파리 보자르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그리고 30세에 한국에 돌아와 결혼하여 50세까지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라벤더와의 인연은 20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학시절, 한번은 ‘블루’를 주제로 작업을 했다. 파란색에 대해 고민하고 이미지를 찾아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농촌은 벼농사만 짓고 산은 온통 시퍼렇기만 한데 이곳은 참 다양하구나. 어쩜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다를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예술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작품을 만들어 갤러리에 넣고 몇몇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과연 예술인가? 백남준은 예술이 사기라고 했는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예술이란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고, 또 아름다움이란 사람마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다. 그럼 나는 뭘 하고 싶지?

뭘 하고 싶은지를 찾다가 파란색 작업을 할 때 알게 된 라벤더가 떠올랐다. 식물이 어떻게 파랄 수 있는지 궁금해 하며 라벤더를 알아가기 시작했는데, 프랑스 남부에는 라벤더로 먹고 사는 마을이 있었다. 그 작은 마을에서 라벤더가 한창 피는 기간 동안에는 1년 전부터 모든 숙소 예약이 끝나고, 꽃이 피면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고 했다.

예술을 한다면 바로 이런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한다면 어떨까? 농촌에서 마을 사람들이 같이 하면 벼농사를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고 농촌풍경도 많이 달라지겠구나 싶었다. 한번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유학하면서 나랏 돈 많이 가져다 썼는데 뭔가 우리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내가 차린 밥상에 다른 사람들이 숟가락 올릴 수 있게 하는 것이 배운 사람, 예술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라벤더 농사를 지으면서 학이재 축제를 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내던 서른 즈음, 엄마가 결혼을 재촉했다. 선을 봤고 엄마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 엄마는 특별한 분이었다. 심하게 보수적이었고 종아리도 많이 맞고 자랐다. 첫딸이라고 원피스를 맞추어 입히고 항상 구두를 신겼다. 어린 시절 그의 발 뒷꿈치는 자주 까져 있었다. 하루는 쑥 캐러 나갔다가 과외를 빠졌다고 호스로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 그런데 엄마는 다음날 원피스를 입혀서 학교에 보냈다. 우리나라에선 감정을 숨겨야 하고, 싫은 것도 해야 하고 ‘척’ 해야 하는 일이 많다. 자기에게 집중하기 보다는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어찌 보면 유학은 불타는 학구열이 아니라 감정이 말살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라벤더농사를 하게 해주면 결혼하겠다고 말했고 아버지가 알았다고 하셨다. 남편은 서울공대를 나왔다. 엄마가 무척이나 좋아했고 나도 그런 엄마를 보며 같이 좋아했다. 다행히도 남편은 좀 보수적이긴 하나 참으로 선한 사람이었다.

결혼하니 세상은 생각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머릿속엔 온통 작업 생각뿐이었는데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다. 슬펐다. 그래서 남편 뒷바라지 잘하고 애들 잘 키워서 애들이 성인이 되면 그때 내 일을 하자고 결심했다. 두 아이들은 중고등학교를 다 영국에서 유학했다. 머리 좋고 감수성 풍부할 때 그것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찍이 유학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하려고 한 눈 팔지 않고 남편과 아이들을 뒷바라지했다. 아내로, 엄마로 산다는 것이 참 힘들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이 정도는 견디어내야 할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뭘 준비해야 나중에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다가 허브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영국을 오가며 에센셜 오일을 사서 여러 가지 작업도 시작했다. 화장품은 이때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유학시절 교통사고를 당한 후 손바닥이 벗겨지는 피부병이 생겨 오래도록 고생했다. 스테로이드 연고를 계속 발라야 했다. 치료를 위해 안 해 본 게 없었다. 의사는 그냥 만성적으로 달고 살라고 말했다. 그런데 에센셜 오일로 비누를 만들고 여러 가지 천연향을 맡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습진이 올라오지 않았다. 한 달 간 영국에 가 있으면 한 두 개 습진이 올라왔지만 한국에 와서 향을 맡으면 다시 가라앉았다. 아로마향이 코를 통해 폐로 들어가 피를 한 바퀴 돌면서 호르몬 균형을 맞추니 몸을 치유된 것이다.

약초를 달여 마시는 한방과 향을 마시는 서양의 전통의술은 원리가 동일했다. 치유에 확신이 들면서 이 분야가 재미있어졌다. 라벤더의 기능이 뭔지, 다른 식물들은 어떤지, 허브의 역사를 깊이 공부했고 아로마테라피 자격증을 취득했다.

결혼 후 그는 종교에 귀의하고 날마다 기도했다.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려면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해야 할 일이라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그는 아이들을 유학 보낸 후 강남의 큰 아파트를 전세주고 작은 전세집으로 옮겼다. 2년 만기가 가까워오자 세입자는 나간다고 하면서도 집을 보여주지 않았고 다른 세입자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살던 곳의 전세가격이 많이 올라 서울 외곽으로 나가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때 그는 남편에게 어렵사리 얘기를 꺼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하면 안될까?” 잠시 회사를 그만두고 있던 남편은 얼결에 한번 해보라고 했다. 그 길로 산청에 계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라벤더 농사를 짓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때 아는 분이 가지고 있는 제주도 땅을 그냥 쓰라고 하여 남편과 함께 내려가 그 곳의 지원제도를 알아보고 살집도 알아본 후 엄마에게 전화로 알렸다. 엄마는 3일간 펑펑 울고 난 후 산청으로 오라고 했다. 바로 다음날 진주의 아파트를 계약하고 학이재에 자리를 잡았다. 학이재는 한때 서당이었고 이현숙님이 태어난 집이었으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다. 기막히게 가득한 쓰레기를 남편과 함께 1년 동안 치웠다. 새벽 다섯 시에 출근하고 해가 지면 퇴근했다. 신기하게도 오십 견이 있던 남편의 어깨가 좋아졌다. 땀방울이 준 보답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서 너무 좋았지만 힘든 일도 많았다. 유학까지 마친 딸의 시골생활은 보수적인 엄마의 자존심에 칼질을 한 일이었다. 학이재에 온 날부터 구박이 시작되었다. 3년간 이 세상 욕이란 욕은 다 들었다. 엄마라고 부르지도 말고 어디 가서 딸이라고 말하지도 말고 얼굴도 가리고 다니라고 했다. 학이재에 들여놓은 컨테이너도 산청에서 구입하지 못하고 포항에서 엄마 몰래 들여왔다.

학이재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남강.

부모님의 비난으로 가슴에서는 피눈물이 흘렀지만, 학이재에서의 시간은 보람이 있었다. 여기서 일하면 여기가 빛나고 저기서 하면 저기가 빛났다.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해서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라벤더 심을 돈이 없었는데 식목일에 나무 심을 지인들을 모으니 200~300만원이 생겼고. 남편 친구들의 통 큰 투자로 라벤더 묘목을 전부 살 수 있었다. 엄마도 금전적인 도움을 조금씩 주기 시작했고 동생과 시어머니도 조금씩 도와주었다. 군에서 주택수리비 지원도 받았다.

첫 학이재 축제 때는 영국에 갈 때마다 벼룩시장에서 조금씩 사 모은 골동품 도자기를 팔려고 내놓았는데 진주와 부산에서 온 손님들의 호응이 컸다. 그 덕에 농사지을 종잣돈을 처음으로 마련했다. 다음해부터는 비누와 라벤더워터 등 라벤더 제품으로 채워나갔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장품을 제조하기 위한 조건이 있는데 이를 위해 제약공학과에 편입하여 지난해 2월에 졸업했다.

학이재에 터를 잡은지 5년, 학이재 축제를 연지 올해가 3년째다. 축제에는 목화장터에서 만난 이웃의 작품도 초대했다. 그는 학이재가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물건을 자랑하러 오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외국의 작은 마을에는 오랜 시간 손으로 공들여 만든 작품들이 많다. 내년에는 일본의 작은 마을 수공예품을 초대할까 고민 중이다.

정성을 들여야 뭔가가 나온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그의 말에 깊은 울림이 있다. 시골살이야 말로 예술적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아직 공을 들인다고는 말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을 사는 내게 그의 이야기는 큰 배움이 되었다.

항상 그의 가슴속에 있는 꿈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라벤더 농사를 짓는 것, 그리고 그 라벤더로 만든 자연화장품을 통해 사람들의 건강한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가슴속 깊이 키워온 젊은 날의 꿈을 고향에서 펼쳐가는 그가 있어 약초와 한방의 고장 산청이 한층 더 아름답고 풍성해질 것 같다.

윤인숙  yoonis@seob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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