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연. 진주출생, 경남문학 신인상 동시부문 등단 / 경남문인협회, 경남아동문학회 회원.

땡글땡글 여문 곡식이 들판을 수놓았다. 떡시루 덜어내듯 하루가 다르게 논 한 뙤기 한 뙤기가 비워지고 있다. 비움을 증명하는 빈 들을 본다. 곡식들을 가득 담고 있을 때보다 가벼워 보인다.

어르신을 만나러 가는 길, 눈앞에 펼쳐진 들녘에서 경외감을 느낀다. 처음 내가 독거 어르신을 만날 때의 느낌과 흡사하다.

추수를 마친 들판과 자식을 도시로 내보낸 어르신의 낯빛은 닮아 있다. 곡식이든 자식이든 함께 있을 때는 살갑다가 훌훌 떠나보내고 나면 그 빈자리가 크고 아련하기 마련이다.

작년부터 나는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 활동하고 있다. 농촌에서 홀로 계시는 노인 분들을 찾아뵙고 보살피는 일이 주 업무다. 늙고 불편한 몸으로 고독한 하루하루를 살아내시는 그 분들 삶 속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들어가면서부터 이전에 내가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올여름 유난했던 폭염은 팔십 년 만에 찾아온 길고 살인적인 더위였다. 더위에 약한 어르신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경로당에서 보냈다. 에어컨 한 대에 십여 명이 함께 누워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셨다.

그러다가 한여름이 지나고 늦더위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 어느새 집집마다 들깨와 참깨 단들이 줄을 섰다. 배추 모종판에는 떡잎이 돋아났다. 여름 내내 겨울잠을 주무시듯 꼼짝 않았는데 들깨 참깨 농사는 언제 지었을까, 무더위 속에서 배추씨앗은 언제 모종판에 놓았을까 어리둥절했다.

합천으로 이사 온지 삼 년 째다. 시골생활은 그 철을 알아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벼와 보리, 파와 마늘, 배추와 고추…. 모든 작물은 저마다 씨 뿌리고 모종을 심는 시기가 달랐다. 철을 놓치면 그해 거둘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남의 논밭에서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힐 시점이 되어야 나는 화들짝 놀란다. 아, 올해도 배추를 못 심었구나! 마트에 가면 사계절 살 수 있는 것들도 제 철이 있음을 알아가는 일이 나에겐 새삼스러웠다.

어르신들은 평생 몸으로 익혀온 철을 어김없이 짚었다. 폭염과 혹한도 그것을 막지는 못했다. 또한 그 분들은 서둘러야 할 일과 기다려야 하는 일에도 정확하다.

내가 돌보는 어르신 중에 불편한 다리를 끌고 윗몸만 유모차에 의지해 이동하면서도 집에 잘 계시지 않는 분이 있다. 텃밭이라고 하기는 꽤 넓은 밭을 경작하느라 무더위에도 경로당에 잘 계시질 않는 분이다. 집에서 움직일 때는 엉금엉금 기어 다닌다. 지난해와 올 해 명절에도 다리 아프다는 핑계를 대시며 혼자 집에 계셨다.

며칠 전 그 어르신을 찾아갔을 때, 때마침 마당에서 끝물고추와 솎음 무를 가리고 계셨다. 나도 어르신네 마당에 퍼질러 앉아 그것들을 가리며 제법 긴 시간을 보냈다. 끝물 고추는 부각을 좋아하는 셋째아들을 위해 쪄서 말리고, 솎음 무는 주말에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막내며느리를 위해 김치를 담그실 거라고 하신다.

“어데 내 혼자 먹을라꼬 농사를 짓나? 자슥들이랑 나눠 먹을라꼬 짓재. 부모는 자슥들 거름이여.”

어르신은 혼잣말처럼 뇌이셨다.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되물었다. 나는 언제 누군가의 거름이 되고자 한 적이 있었던가! 부끄러웠다.

어떤 스승이 이렇듯 스스로 길을 내어 가도록 따가운 일침을 놓을까. 어르신들은 모든 이들의 부모님이자 큰 스승이었다.

여행하고 싶은 계절이다. 행여 그 곳에서 등 둥글게 하고 천천히 움직이는 어르신을 만난다면 먼저 말을 건네자. 가끔은 노인에게 길을 물어도 좋다. 무심코 찾은 그 길 위에서 세상의 거름이 되어가는 고운 삶 하나 만나게 될 지도 모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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