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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죽
  • 서부경남신문
  • 승인 2019.01.12 00:38
  • 호수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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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 산청군 차황에 살며, 글쓰기모임 ‘까르페디엠’ 회원.

작년 늦가을, 누렁이가 된 호박을 수확했다. 여름 내내 땀 흘리며 몸집을 키우다가 가을 햇볕에 온몸 돌려가며 익은 놈이다. 두어 달 숙성시킨 후 호박죽을 끓였다. 어머니의 손맛을 짚어가며 팥과 찹쌀가루도 넣었다.

내 어머니는 자식들이 뭘 먹고 싶다고 스쳐 지나듯 말하면 허투루 듣지 않으셨다. 며칠 내로 음식이 뚝딱 만들어졌는데 식재료 준비에 문제가 있었어도 때가 되면 어찌해서든 만들어 내셨다. 그땐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서 조리해야 했다. 매우 성가시고 번거로웠을 텐데 귀찮은 내색 한번 하지 않으셨다. 가족들이 맛나게 먹는 걸 지켜보는 게 어머니의 즐거움이었다. 때론 잠들어 있는 우리들 머리맡까지 음식을 가져와서 깨우는 일도 있었다.

“자더라도 먹고 자라.”

농부인 아버지가 체력이 약하다보니 어머니의 일은 상대적으로 많았다. 남자가 해야 할 일을 어머니가 하도록 두는 아버지는 어린 우리 눈에도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많은 일을 감당하려면 어머니는 늘 빨라야 했고 당연히 일속에 파묻혀 살아야 해서 안타까웠다.

어머니는 알람시계이기도 했다. 우리가 몇 시에 깨워달라며 아무렇지 않게 주문하면 꼬박꼬박 깨워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부당했는지 어이없기도 하지만 그땐 그냥 당연시했었다. 어머니의 수면은 얼마나 방해 받았을까. 알람시계가 없던 시대였으니 그 시각에 맞춰 깨워주기 위해선 깊이 잠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시간은 거의 가족들을 위한 것이었고 당신 자신을 위한 시간은 없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때만 나는 실재한다.’라고 말한 구르지예프의 말에 나는 적극 동의한다.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된 나는 외국기업 대리였던 딸애가 육아휴가를 끝내면서 애기를 봐 달라고 했을 때 단호히 거절했다. 때문에 딸아이는 사표를 냈고 결국 피하고 싶었던 경력 단절녀가 되었다.

나는 나의 엄마처럼 내 시간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해 쓰고 싶었다. 실존, 페미니즘 따위를 몰랐던, 가족이 삶의 의미였고 전부였던 내 어머니와 나의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동안 삶의 질은 많이 달라졌고 의식도 변했다. 애써서 조리하지 않아도 완제품을 집까지 배달시켜 먹을 수 있는 시대이고,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라고 알람시계가 친절하게 깨워주는 시대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분명 좋은 세상이라고 할 것이다. 어머니의 역할이 없어진데 대해선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나이든 탓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 같다. 욕심이 없었고 현실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최선임을 알았던 나의 어머니….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호박죽 한 그릇 퍼놓고 어머니 얼굴을 살려낸다. 음식이 많으면 이웃들을 불러 둘러앉아 먹던 어머니, 후딱후딱 빠르게 만들어도 양념을 듬뿍 넣어 만든 어머니의 음식 맛은 다들 입 모아 칭찬했었다. 내가 끓인 호박죽은 어머니의 호박죽보다 맛이 떨어진다. 장작불에 끓이지 않는 탓도 있을 것이나 마음을 온통 쏟아 끓이지 않아서일 것이다.

사람이 일생 중에 제일 행복한 때는 부모 밑에 있을 때라고 한다. 어머니가 전부였던 우리와 달리 어머니의 사랑이 없는 과도기적인 세상에서 커가는 요즘 아이들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기나 할까. 내 어머니가 쏟아준 사랑만큼 완벽한 사랑은 아무리 돌아봐도 없어 보인다. 호박죽을 먹으며 어머니 생각에 또 그리움이 쌓인다.

아,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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