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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의 해방’
  • 서부경남신문
  • 승인 2019.09.05 14:22
  • 호수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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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제의 핵심은 시민에 있다
공동체 참여와 결정하는 권리

시민에 의지하지 않는 권력은
어느곳에서도 존재할 수 없다

정의는 시대에 따라 움직이나
형이상학적 요소 가지진 않아

균형적 시민이 권력오판 수정
기만으로부터 진실 공정 추구

프랑스 혁명은 거의 모든 계급이 참여한 민주주의 혁명이며 자유와 평등을 위한 전 국민의 싸움이었다. 사진은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사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한의준 칼럼리스트]

우리나라에서 시민권력은 긴 시간을 놓고 볼 때, 독재에 비례하여 여러 형태로 발달해왔다. 그 결과, 선거권의 온전한 확립은 물론 자유로운 단체의 결성 및 집회, 심지어 청와대 턱밑까지 합법적 시위가 가능해졌다.

특히 2016년의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은 정점에 다다른 시민권력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루이16세를 처형한 프랑스혁명보다 더욱 강렬했다. 루이16세와 달리 대통령은 시민이 선출한 권력이므로 그 통치의 정당성은 18세기 부르봉왕가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민권력이 정점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다. 탄핵에 대한 찬반은 차치하더라도 시민 대부분이 지금의 정치를 비토하고 있다. 온갖 신조어를 동원해서라도 정치를 절하한다. 이러한 세태는 여러 문제에 근거하나 근본적으로 민주제의 권력 작동과 시민계급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민주제의 핵심인 ‘시민’은 법률적, 사회적 주체로서 공동체 의사에 참여하고 결정하는 권리를 지닌 인격체다. 시민계급의 태동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근대 서구뿐 아니라 아시아 역사 곳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발달 양상과 속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이르러 다수의 국가가 유사한 권력 체제를 이루었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시민의 당위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시민이 권력의 주체라는 점과 그것의 메커니즘을 이해했다는 것은 다르다. 민주제가 시민의 재산을 보존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공정사회를 완전히 구현할 제도란 믿음은 결과적으로 오류다.

민주제는 기본적으로 시민의 참여와 견제를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이는 시민이 선출권력을 입헌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는데, 이는 본래의 의도와 달리 모든 권력은 선천적으로 최대한의 팽창을 추구한다는 경향을 간과한 것이다. 권력의 확장성은 대부분 제도하에서 상당히 적극적이며 위선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권력이란 기본적으로 시민을 보호하고 한정된 재화를 효과적으로 배분하여 갈등을 조정하는 힘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선출권력에 의한 재분배는 표상과 표의 간의 괴리를 가진다.

1인 가구에 대한 큰 과세(적은 공제), 소득과 관계없이 만 7세 미만이면 무조건 지급되는 아동수당, 부농에게 주어지는 농가보조금, 과도한 혜택으로 도덕적 해이를 야기하는 중소기업기본법, 다수의 비교적 가난한 소비자가 희생되는 부가가치세 등은 선출권력이 사권(私權)과 공공재를 훼손하는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사례는 시민으로부터 선출된 권력이 내세우는 재분배의 대부분이 ‘가난하지 않은 집단’ 내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시민이 추구하는 중요 가치 중 하나가 재분배를 통한 공정이라는 점에서 더욱 역설적이다. 이러한 모순은 선출권력의 확장이 시민을 기만하고 정의를 구축(驅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망스럽게도 위임된 권력은 시민의 재산과 이익을 우선하지 않는다. 시민의 합의로서 선정된 대리인이지만 세금을 재원으로 삼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과세는 더 많이 하면서 그것에 비례하는 보호서비스를 담보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선출권력이 공공재를 이용하여 고도의 팽창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재를 소진하는 재분배는 선거권을 많이 보유한 연령, 성별, 직업, 지역 등에 상당한 차별적 우대로 나타난다.

2021년 하위 70%까지 확대될 기초연금의 재원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없는 이유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현실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공무원·군인·사학연금 등은 시대 변화에도 불구하고 개혁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한해 20조원 이상을 투입하는 저출산 예산의 집행은 결과적으로 비합리적이다. 예비타당성 조사제도는 정치적으로 무력화되었다. 공공재를 사용하여 얻는, 그런데도 시민의 유의미한 이익을 획득하지 못하는 권력행위는 궁극적으로 매표(買票)에 지나지 않는다.

아울러 선출권력에 의한 재분배는 ‘가난하지 않은 집단’ 내에서 대부분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이분법을 제시하기에 자의적인 정의(正義)도 양산한다. 그 결과 사회는 분열되고 시민은 분산된다. 이러한 시류는 민주제로서 추구했던 합의와 지성에 의한 관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아일라우 전투’.

독일의 사회·경제학자 ‘한스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에서 위탁된 권력의 한정된 시간(선출과 임기)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사회재원의 탕진, 업적주의,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회부조리를 가감 없이 진단한 바 있다. 그는 지금의 민주제 즉, 시민이 행정·국방·징세·사법권을 독점적으로 위임하는 것은 종속협정(Pactum subjectionis)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물론 종속협정에 대한 그의 주장은 현대 시민이 보유한 저항권을 배제하였으므로 한계가 뚜렷하다. 그렇다고 현대 시민이 그 저항권을 제대로 행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기한 퇴진운동이나 근래 홍콩시위와 같은 폭발적인 군중저항은 시민이 보유한 ‘고도’의 저항권으로 보긴 어렵다. 왜냐면 그러한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저항권에 대한 무관심, 그에 따른 민주제의 오작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호페는 공공의 이익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선 지금의 민주제보다 과거의 군주제가 더 낫다고 하였으나 이는 사권의 극대화를 주장하는 선험적 리버럴리즘(liberalism)과 애너키즘(anarchism)에 상당 부분 근거를 두므로 오늘날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의 민주제를 어떤 시각으로 접근하고 이해해야 팽배한 불신을 거둬내고 건강한 시민권력을 견지할 수 있는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은 시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매우 현대적인 헌법과 법률을 갖추었으나 정작 체제에 대한 반감과 제도의 허점을 시민 스스로가 방기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시민은 원래의 합의가 의도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인식하에 제도와 선출권력을 숙고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생략된 시민권력은 자립적이지 못하며 이념 의존적으로 경도되며 신성한 저항권은 당연히 증발한다.

대결적 진영주의와 지역, 성별, 세대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분화된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는 ‘87년 체제’의 한계를 체감하고 있다. 따라서 여러 대안을 검토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문제는 선출권력이 시민의 바람과 더불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복지부동하거나 아전인수 격 논의밖에 없는 것에서 바르게 작동하지 않는 민주제의 민낯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선 고도의 시민권력을 행사하는 방법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빈민정치(ochlocracy)’를 경계하였는데, 이는 다수의 우중(愚衆)이 정의를 집단적이며 편향적으로 점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의는 시대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으나 형이상적 요소를 가지진 않는다. 또한 특정 대상, 계급을 규정하는 도구는 더욱 아니다. 정의의 이런 성격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양극단에서 절대 좁혀질 수 없다.

따라서 시민은 보다 유연해야 한다. 여전히 우리는 어떤 후진성과 부도덕함을 논할 때 사람 또는 집단에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매우 단선적이다. 단선적인 생각은 편리하다. 편리한 것은 소모적이며 스스로 합리성을 가진다. 불편하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행태를 수정하지 않는다면 즉, 시민의 균형적 자정노력을 상실한다면 선출권력에게 종속되는 빈민권력만이 허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히오스섬의 학살’.

독재국가는 시민에 대한 선전과 선동을 체제 유지의 필수조건으로 삼는다. 아무리 폭압적인 권력도 시민이 가진 권위와 잠재력을 외면할 수 없다는 방증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려한 빈민정치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해방된 시민만이 선출권력의 오판을 수정하고 그것의 기만으로부터 진실을 추구할 수 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는 최고선이 최고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찰한 바 있다. 또한, 최고행복 역시 최고선을 전제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민주제가 선출권력을 견제하지 않을 수 있으며 시민이 최상의 정치체제를 구현한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이성의 요구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모순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칸트는 자연필연성(민주제)과 자유에 의한 인과관계(선출권력의 확장성)라는 이율배반(Antinomie)을 도덕적 실천(주체성)으로 해소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시민권력)의 가능성을 확보하였다. 즉, 이성은 도덕윤리를 인지함으로써 실재하며 도덕윤리가 자유의식에 근거하여 존재하는 것과 같이 시민에 의지하지 않는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제도의 문제를 인식한 이성은 이미 민주제의 근간이 되므로 처음에 간과했던 권력에 대한 오류를 충분히 교정할 수 있는 것이다.

건국 이후 행해진 선출권력의 억압과 좌절 속에서도 우리는 시민의 저항권을 지속적으로 행사해봤다. 그 결과 성취한 민주화는 시민권력의 해방 가능성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젠 그 가능성을 현 시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결과로 발전시켜 지금 체제의 모순을 극복할 차례다. 더 나은 제도와 권력구조는 오직 시민의 ‘균형적 자정능력’으로만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성급한 대중성은 지양하고 절하와 비하 이전에 시민계급의 존재이유를 탐구하는 자세야말로 빈민정치를 야기하는 우중과 선출권력 간의 깊은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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