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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가지에 가을이 앉다
  • 서부경남신문
  • 승인 2019.09.28 21:43
  • 호수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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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교 현대수필 등단, 소나무5길 동인.

배롱나무 꽃이 진홍색과 연보라색으로 피어 곱다. 배롱나무는 뜨거운 여름을 견디는 꽃나무다. 도로변에 가로수로 서있어 먼지와 소음에 시달리는 걸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화사한 꽃은 나날이 세를 불려가고 있다. 복잡한 도심에서 이 꽃나무마저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배롱나무는 나무껍질이 얇게 벗겨져 매끈하다. 반지르르한 표면은 얼룩이 돋보여 마치 군복무늬를 연상시킨다. 붉은 꽃이 백일 이상 피어 ‘목백일홍’으로 불리고, 줄기의 흰무늬를 긁으면 간지럼을 타는 듯 나무 전체가 흔들린다고 ‘간지럼나무’라고도 불린다. 원숭이도 미끄러져 떨어진다고 ‘원숭이 미끄럼나무’라는 재미있는 이름도 있다.

배롱나무는 양반집 뜨락과 고요한 서원이나 정자가 있는 곳에 자리하면 더 운치가 있다. 이름난 고택 정원 연못가에 배롱나무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바람이 불자 붉은 꽃이 흩날려 연못 위로 떨어졌다. 나뭇가지에도, 땅에도, 연못에도 한바탕 붉은 꽃밭이 연출되며 장관을 이뤘다. 한 해 두 해 수령이 더해 갈수록 나무의 품새가 멋을 풍긴다. 배롱나무가 귀신을 쫓는다는 속설에 무덤가에도 많이 심겨져 있다. 꽃말이 부귀, 꿈, 행복, 떠나간 임에 대한 그리움이라니 어쩌면 꽃말 때문이기도 하겠다.

한여름 가장 화려한 꽃이 배롱꽃이다. 산천초목이 온통 푸르러서 꽃이 한층 돋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초여름부터 가을 문턱까지 붉고 작은 꽃잎이 모여서 어떤 꽃보다 곱고 환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숭어리가 여자아이의 주름치마처럼 주글주글 주름이 잡혀 풍성해 보인다. 바람이 불라치면 진분홍 주름치마가 나풀나풀 춤을 추는 듯하다. 아무리 어여쁜 꽃이라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는데 배롱꽃은 백일을 피어 있다. 한 꽃이 백일 동안 피어 있는 건 아니다. 수많은 꽃들이 다투어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백일을 밝힌다.

언젠가 이웃의 선생님으로부터 배롱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려 마당으로 나갔더니 낯선 이가 다짜고짜 고향 선영(先塋)에 있는 배롱나무를 사고 싶다고 했단다. 선생님의 고향인 의령 선영에 수령(樹齡)이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는데 그것을 본 이가 나무 주인을 찾아온 것이었다.

종갓집 종손인 선생님이 선영을 오래 관리해오고 있었다. 선생님은 정중히 그 나무를 팔수 없다고 찾아온 이를 돌려 보냈다고 한다. 상대가 거액을 제시하면서 거듭 팔기를 요청했지만 그 배롱나무는 선생님 가문의 역사이기에 끝까지 지켰다고 한다. 무덥던 지난 여름을 나기까지 위안이 되어준 배롱나무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낸다. 화답인 듯 붉은 꽃가지가 잔잔히 흔들거린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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