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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가리 긁어모으던 추억
  • 서부경남신문
  • 승인 2019.10.29 15:25
  • 호수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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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소설가. <카론의 배를 타고>, <700년 전 약속>.

군불 때서 밥 짓고 구들을 데우던 그 시절에는 솔가리가 최고의 불쏘시개였다. 솔가리는 소나무 낙엽으로 갈비 혹은 깔비라고 불리거나 솔까리나 갈퀴나무라고도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우리 집 나무꾼이었다. 여름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 찹찹한 바람이 불어올라치면 아버지는 부엌과 가까운 담장 밑에 기다란 통나무 두 개를 나란히 놓아두고 거기에 솔가리둥치를 만들어 쌓게 했다. 철사로 단단히 나무자루를 조인 갈퀴를 들고 나는 매일 뒷산에 올라 소나무 아래 수북이 쌓인 솔가리를 긁어모았다.

마른솔잎은 불이 잘 붙을 뿐 아니라 연기가 나지 않았고 한 움큼만 넣어도 은근하게 오래 타면서 향이 좋았다. 솔가리 한 짐을 헐어서 밥 한 솥을 너끈히 해내고도 남았으니 단숨에 훌러덩 타버리는 마른콩대나 볏짚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초가을부터 첫눈 내리는 겨울초입까지 나는 갈퀴자루를 둘러메고 솔가리를 긁으러 앞산 뒷산을 누볐다.

솔가리를 갈퀴로 긁어모아 묏등마냥 수북하게 쌓아놓으면 둥치는 엄마가 짰다. 엄마는 갈퀴를 바투 쥐고 마치 베틀을 잡아당기듯 솔가리를 척척 당겨 모아 네모지게 모양을 만들었다. 시루떡판처럼 다듬어진 솔가리뭉치를 마주보게 한 판씩 깔고 그 위에 생솔가지를 뚝뚝 끊어서 얹고는 다시 솔가리뭉치로 덮었다.

솔가리를 긁어모아 아궁이에 불을 붙여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우리 어머니들 모습. <자료사진: 광주시립민속박물관>

둥치 속에 든 생솔가지는 서서히 말라서 그 또한 요긴한 땔감이 되어주었다. 당시 생솔가지를 꺾는 일은 불법이어서 엄마의 손놀림은 빨랐으며 자못 긴장감이 배어있었다. 나는 엄마가 생솔가지를 낫으로 꺾는 동안 망을 보듯 주변을 살폈다. 한길에 오토바이라도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엄마를 큰소리로 불러서 낫질을 멈추게 했었다. 그렇게 해서 솔가리둥치가 만들어졌다.

솔가리둥치가 다 만들어지면 집까지 날라야했다.비탈진 곳에 둥치를 두고 내가 절을 하듯 엎드리면 엄마가 둥치를 밀어 내 머리에 올려주었다. 나는 그것을 이고 잰걸음으로 집까지 날랐다. 다리가 불편한 엄마보다 내가 더 걸음이 빨라서 엄마가 둥치를 짜는 동안 몇 개를 나를 수 있었다. 마지막에 두 개가 남으면 나 하나, 엄마 하나 나란히 이고 산을 내려왔다. 어느덧 담장보다 더 높게 솔가리둥치가 쌓이면 아버지는 눈비에 맞지 않도록 비닐천막으로 위를 덮었다. 담장 옆 솔가리둥치는 겨우내 밥을 짓고 구들을 데우는 요긴한 땔감으로 쓰였다.

집에서 가까운 야산은 나 같은 여자애들 갈퀴에 솔가리가 남아나질 않았다. 소나무 거름이 될 솔가리를 마구잡이로 긁어간다고 한때는 법으로 금한다는 말이 돌았다. 우리는 솔가리를 긁다가 오토바이소리만 들리면 망개나무덩굴이나 무덤 뒤에 엎드린 채 몸을 숨겼고 솔가리둥치도 헛간에다 숨겨놓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산을 오르다가 소나무 아래 수북한 솔가리를 볼라치면 잠시 발길이 멈춰진다. 요즘 보면 어딜 가나 솔가리가 지천이다. 다만, 작고 마른 제 몸보다 더 큰 솔가리둥치를 머리에 이고 싸리문을 들어서면 두 팔 벌려 받아주시던 아버지가 이제는 안 계시니 글로 서럽다. 성냥개비 그어 솔가리에 불붙이면 타닥타닥 불길이 타오르고, 가만가만 불길을 아궁이에 밀어 넣을 땐 마음까지 따스해지던, 그때 그 시절은 꿈에서나 만나질 것이다. 비록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솔가리 긁어모으던 추억은 내 가슴에 꺼지지 않을 잉걸불로 남았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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