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솜사탕 같은 벚꽃들이
모두 지기 시작할 때
낙향한 선비의 도도한 자태로
마지막 봄밤을 노래하는 곳

큼직한 돌다리가 난간도 없어
옛 모습 그대로 정취 자아내
소동파가 노래한 ‘봄밤’ 절경은
용원정 쌀다리가 아닐까 싶어

춘야 (春夜) - 소동파 거창군 마리면 고학마을 용원정과 쌀다리. 春宵一刻直千金 춘소일각치천금 花有淸香月有陰 화유청향월유음 歌管樓臺聲寂寂 가관누대성적적 鞦韆院落夜沈沈 추천원락야침침 봄날 밤의 한 시각은 천금에 값하나니 꽃에 담긴 맑은 향에 달조차 향기롭다 누각의 노래와 피리소리는 여운 남기고 그네만 남은 정원에 밤은 깊어만 간다

중국 송나라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봄날 밤은 천금(千金)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봄밤’의 정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 시구는 천하의 명구(名句)가 됐다.

거창 마리면 고학마을 용원정 쌀다리 벚꽃은 낙향한 선비처럼 도도하지만, 제 빛깔을 잃지 않고 봄이면 주변 계곡과 어울려져 한껏 아름다운 미를 자랑한다. 마치 하얀 솜사탕을 뿌려 놓은 듯한 쌀다리 위에서 여인들이 봄을 만끽하는 모습. 자료사진. <사진: 김정중 거창군 주무관>

벚꽃 떨어지는 봄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봄이 와도 봄이 오지 않았다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라고 아쉬워하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먼발치에서나마 봄을 바라본다.

벚꽃의 명소는 여러 곳이 있다. 거창~합천댐을 지나 합천영상테마파크가지 이어지는 벚꽃길은 무려 40㎞에 달해 백리벚꽃길로 불리며 합천 8경의 하나로 대접받고 있다. 호반도로가 벚꽃으로 뒤덮일 때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그지없이 좋다.

함양 백전면 50리 벚꽃길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함양 천년의 숲 상림공원에서 출발해 백전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만개한 분홍빛 벚꽃이 자아내는 진풍경은 절로 가슴을 뛰게 만든다. 백전면에서 서하면으로 넘어가는 길은 벚꽃이 끊어졌지만 서하면에서 서상면, 안의면으로 이어지는 벚꽃길도 장관이다. 안의에서 서상길이 벚꽃이 일찍 피고, 백전이 조금 늦게 핀다.

산청은 신안면 원지 강변로 벚꽃길이 아름답다. 고양이 걸음처럼 슬며시 가버릴 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일상 차림으로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면 그곳이 바로 박하사탕같이 청량한 빛을 먼저 반기며 눈이 즐거워지는 순간이 된다.

거창은 읍시가지에서 3분 거리에 위치한 덕천서원 곰실벚꽃이 경치가 일품이라 사진작가는 물론 나들이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이곳의 벚꽃은 마치 하얀 솜사탕 같다. 연못을 중심으로 둥글게 줄지어 피어난 벚꽃은 아름다움을 뽐내며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2일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할 무렵 용원정 쌀다리에서 아이들이 봄을 흥겹게 노래하고 있다. <사진: 김정중 거창군 주무관>

거창, 함양, 산청, 합천의 벚꽃이 조금씩 지기 시작할 때쯤 마지막 절정을 노래하며 피어나는 숨은 명소가 있다. 낙향한 선비처럼 도도하지만, 제 빛깔을 잃지 않고, 봄이면 주변 계곡과 어울려져 한껏 아름다운 미를 자랑하며 마지막 봄밤을 노래하는 곳.

거창 마리면 고학마을 용원정 쌀다리는 그 어디를 배경 삼아도 멎진 벚꽃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리 중앙의 받침대 하나로 세워진 큼직한 돌다리가 난간이 없어도 옛 모습 그대로 정취를 자아낸다. 이곳에서 흩날리는 벚꽃은 소동파가 노래한 ‘봄밤’의 절경이 아닐까도 싶다.

용원정 쌀다리에는 따뜻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조선시대 한양으로 가는 삼남대로였던 이곳에 다리가 없어 길손들이 불편해 하자 1758년 오성제, 오성화 두 형제가 쌀 1000석을 내 놓아 그 돈으로 돌을 구하고 3일 동안 다리를 놓았다고 하여 ‘쌀다리’라 불리는 곳이다. 지금은 정자를 오가는 다리로만 활용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모두가 힘든 시기이지만 소동파가 그러했듯 ‘쌀다리’ 위에 앉아 분홍색 벚꽃비를 맞는 상상을 해보자. ‘봄밤’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 가슴 속에, 당신의 눈동자 속에 먼저 와 있다.

이영철 기자  achimsto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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