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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이진숙 소설가.

휴일이면 자주 뒷산에 든다. 날이 풀리면서 운동 삼아 시작한 산행이 지금은 중독처럼 돼버렸다. 겨우내 앙상하던 뒷산은 하루하루 변하고 있다. 거대한 짐승이 털갈이라도 하듯 쉴 새 없이 산이 자라는 중이다. 봄꽃 한바탕 피고 지더니 가지마다 새잎이 돋느라 요란하다. 수피가 검고 몸통이 쩍쩍 갈라진 늙은 나무가 기적처럼 연둣빛을 매달았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자세히 보아야 볼 수 있는 풀꽃도 발밑에서 바쁘다.

며칠 전엔 친구와 산에 올랐다. 둘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산길로 접어들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숨을 고르고 목도 축일 겸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길 옆 너럭바위에 앉아 물을 들이켜던 우린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너럭바위 주변 양지바른 풀밭에 하얗고 뾰족한 새의 꼬리가 오종종하게 꽂혀있는 게 아닌가.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니 새의 꼬리가 아니라 풀꽃이었다. 쫑긋 갈라진 흰 꽃잎에 핏줄 같은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자세를 바꿔가며 꽃을 담느라 바빴다. 친구는 꽃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며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이 꽃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 모를 꽃!”
내가 장난스럽게 받았다.
“아니야. 분명 이름이 있어.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은 없어.”

그 말에 내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껏 수많은 풀꽃을 만나면서도 그 이름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게 부끄러웠다. 친구는 꽃 이름을 끝내 기억해내지 못했고, 나중에 찾아서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그에게서 꽃 이름을 알리는 문자가 왔다. 산자고였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 풀로 까치무릇이라고도 한다며 친절하게 덧붙여줬다. 나는 그 이름을 잊어버릴 새라 입속에 넣고 오물오물해봤다. 너럭바위 아래서 만난 산자고 꽃내가 입가에 확 번지는 게 느껴졌다.

요사이 산에 오를 때면 발밑을 살피며 들꽃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야생화사전을 들고 다니며 이름을 찾아보기도 한다. 현호색, 노루귀, 얼레지, 깽깽이, 제비꽃, 솜다리, 개별꽃, 쇠뜨기…. 이제는 알아보는 꽃도 제법 늘었다. 아무리 작은 들꽃이라도 이름이 있다. 들꽃의 이름은 생김새나 약효나 자라는 곳에 따라 붙여진다고 한다. 괭이밥은 고양이가 배 아플 때 먹는다고, 강아지풀은 이삭이 강아지 꼬리를 닮아서 붙여졌다. 애기똥풀은 줄기를 꺾으면 애기 똥 같은 노란 즙이 나오고, 엉겅퀴는 피를 엉기게 하는 약효가 있으며, 쇠뜨기는 소가 잘 뜯어먹고, 꿀풀은 꿀이 많아서란다. 들꽃 이름에 담긴 사연들을 알면 알수록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그것에게 관심을 갖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절로 읊조려지는 순간이다.

지금껏 ‘이름 모를 꽃’이라고 한데 뭉뚱그려서 불렀던 지난날을 반성하며 들꽃을 만나면 꼭꼭 제 이름을 불러주려 한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닌 가슴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가만가만 이름을 불러주면 꽃들은 알록달록한 얼굴을 내밀거나 눈웃음으로 화답을 하는 것 같다. 그럴 때면 괜스레 가슴이 뛰고 나도 저들과 같은 색깔로 어여삐 물들어가는 느낌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고맙다. 이 하루에게도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 불러주고 싶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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