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새옹지마
코로나 보릿고개
이인숙 산청 신안면에서 ‘북카페 푸실’ 운영.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출근길 도로변 들판에 연둣빛 잔물결을 일으키며 여물어 가는 보리를 보니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 노래가 절로 나왔다. 얼마만의 출근길인지…. 아마도 20년은 된 것 같다.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가 경제 불황의 늪에 빠졌다. 내가 사는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5년째 산청 원지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엔 이 동네 유일한 카페여서 그럭저럭 운영이 되었다. 그것도 잠시, 작은 면소재지에 크고 작은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무려 열 개가 넘는 카페가 세련된 인테리어와 다양한 메뉴로 경쟁하고 있다.

올봄에는 카페를 정리하려 맘먹었는데 때 아닌 코로나19가 덮쳤다. 가게를 내놓은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이 불황에 선뜻 인수할 사람은 없고 월세 지급일은 꼬박꼬박 돌아왔다. 지자체에서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계획이 발표되었고, 지역 면사무소에 파견되어 업무를 보조할 기간제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다행히 채용되어 두 달이라는 짧은 일자리를 구했다.

나는 지역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소규모 면사무소로 배정되었다. 시골 면사무소는 도시의 관공서와는 달리 아홉 시 전에 일찌감치 업무가 시작된다. 부지런하신 동네어르신들이 자동출입문을 가르며 면사무소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모두들 바빠진다. 홍해바다 가르듯 시원하게 열리는 자동출입문과는 대조적으로 할머니는 굽은 허리를 가녀린 지팡이에 의지하고 슬로모션으로 현관을 들어섰다. 열 체크와 방명록 작성 테이블에 기대어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목에 두른 알록달록한 쉬폰스카프가 나름 멋을 부렸음을 말해준다. 다가가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쭸더니, ‘코로나, 코로나’ 하신다.

신청서 작성을 도와 드리고 도장을 찍을 차례인데 집에 두고 오셨다는 말에 서명을 하시라 했다. ‘글씨를 잘 못 쓴디 우야꼬?’하며 수줍게 웃으신다. 볼펜을 받아 쥐고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이름을 적은 후 숙제검사 받는 초등학생처럼 내 표정을 살핀다. 이름 세 글자가 주인을 닮아 금방이라도 흔들리며 고꾸라질 것 같다.

“카드 잃어버리지 않게 잘 보관하세요.” 

지원금이 들어있는 선불카드 사용법을 설명하고 손에 꼭 쥐어드렸다. 내가 드리는 것도 아닌데 나에게 연신 ‘고맙소, 고맙소’하시며 모퉁이가 닳아 보풀 핀 빛바랜 빨간 나일론 손가방에 카드를 넣고는 지퍼를 단단히 닫았다. 다홍색 쉬폰스카프가 홍해바다를 가르더니 슬로모션으로 면사무소 앞마당으로 향했다.

지자체 지원에 이어 국가지원이 시작됐다. 이렇게 퍼주다간 나라 곳간이 거덜날거라며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2020년대 보릿고개를 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겪어보지 못한 재난상황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에겐 충격이 덜 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원이 절실한 이들이 주변에 많다. 얼어붙은 소비로 소상공인들은 한 달 한 달 월세를 쥐어 짜내며 보릿고개를 버티는 중이다. 재난지원금을 지역 내에서 사용하도록 한 결정에 자영업자로서 참 고마움을 느낀다.

퇴근길 다시 보리밭을 지난다. 보리가 노랗게 익으면 코로나19의 불황도 끝이 날까. 그 시절 민초들의 간절함을 떠올리며 보리밭 물결을 바라본다. 신청서 작성에 서툴고 귀가 어두운 어르신들을 종일 상대해서일까. 퇴근해서 부랴부랴 저녁을 먹고 나니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왔다. 자꾸 눈꺼풀이 감기면서 낮에 불렀던 노랫가락이 새나왔다.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부경남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