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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 선생의 서릿발 상소문에 수라상을 차버린 광해군한평생 충절을 지킨 동계 선생… 고사리·미나리로 연명

동계는 남명 학풍의 대표 인물
‘선조·광해·인조’ 임금 대에 활동
손꼽히는 경상우도의 명가 집안

상소문 올리고 제주도 위리안치
부녀자도 언문 번역해 상소 읽어

훗날에 추사 김정희 생활한 곳
동계고택 방문 ‘충신당’ 현판 써

병자호란 할복 실패로 돌아가자
금원산에서 은둔하며 절개 지켜
충의 숭모하여 남계서원 등 배향

동계 정온 선생의 15대 종손 정완수 선생은 경북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은퇴 후 고향에 돌아왔다. 동계 고택에는 항상 많은 손님들이 찾아온다. 손님 접대가 종손에게는 가장 큰 일이다. <사진: 김정중 거창군청 주무관>

부산·경남의 지붕을 이루는 산중의 하나인 덕유산 자락에는 산 좋고 물 좋아 풍광이 뛰어난 세 곳이 있다. 예로부터 ‘안의삼동’이라 일컫는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 계곡이다.

원래 안의현 소속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농월정으로 대표되는 화림동계곡과 심원정과 용추폭포로 유명한 심진동계곡은 함양군으로, 요수정과 거북바위 등 자연을 닮아 신비감을 주는 수승대가 있는 원학동계곡은 거창에 편입되었다.

동계(桐溪) 고택은 원학동 계곡의 거창의 국민관광지로 알려진 수승대옆에 있다. 수승대(搜勝臺)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느라 삶의 시름을 잊는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물과 바위·정자 그리고 주위 경관을 보면 실로 아름답다.

특히 계곡에 있는 거북바위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또 ‘요수정’ 정자에 앉아보면 소나무 등에 인 거북바위가 덕유산에서 시작한 계류와 너무 잘 어울려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동계 정온 선생의 고택.

동계 정온 선생의 종택을 찾아가는 길옆으로 덕유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시내와 물가의 기암과 소나무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아무렇게나 서있는 듯한 기암괴석과 그 위의 노송들 그리고 이들의 배경이 되는 덕유산의 자태에서 어떤 곧고 굳은 힘을 느끼게 된다.

한양에서 경상도를 보았을 때 낙동강을 기준으로 낙동강 좌측이 경상좌도이고, 우측은 경상우도라고 부른다. 경상우도에서 손꼽을 수 있는 집안이 선조·광해·인조 세 임금대에 걸쳐 활동한 동계(桐溪) 정온(鄭蘊) 집안이다.

경상좌도 집안들이 대체로 퇴계의 학풍을 계승했다면 우도 집안들은 남명의 학풍을 계승하고 있는데 동계는 남명의 학풍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계 정온(1569~1641)집안은 손꼽히는 경상우도의 명가다.

이 집안 초계 정씨들은 일찍부터 과거급제를 한 기록이 있다. 정전(鄭悛·동계의 6대조)이 고려 우왕 3년(1377)에 시행한 과거시험인 국자감시의 합격자 101명의 명단이 실린 정사방목(丁巳榜目)에 장원으로 기록된 예조의 문서가 고택에 소장되어 있고, 강동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동계의 조부 승지공(1501~1563) 때이다.

이 집안이 조선시대 명문의 반열에 오른 것은 동계 선생이 광해군에게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 때문이다. 동계가 46살이 되던 해 당시 광해군은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부왕인 선조의 계비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려고 했다.

이에 동계는 상소문을 올려 광해군의 패륜을 지적했다. 이때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을 역모로 몰아죽이고, 외조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까지도 역적이라고 죽였다. 이런 판국에 왕이 패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한 동계를 살려 둘리 없었다.

동계가 올린 상소문은 광해군이 수라상을 받았을 때 입직 승지가 읽었다. “그런 짓을 한 후 죽어서 무슨 얼굴로 역대 선왕들을 만나겠소”하는 대목에 이르자 광해군은 밥상을 차 버렸다고 한다. 당시 광해군이 얼마나 노했던지 이 상소문을 올린 승정원 승지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그 자리에서 파직시킬 정도였다.

기록에 보면 이때 동계상소가 얼마나 민심을 얻었는지 전국의 유생은 물론이고 부녀자들까지도 언문으로 번역하여 상소문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동계는 이런 여론 때문에 죽음을 면하고 제주도 대정현으로 귀양가 10여년 동안 위리안치 되었다.

위리안치란 유배지의 담장주위를 마치 새장처럼 가시덤불을 에워싸서 하늘만 빼꼼 보이도록 조치한 집에서 사는 형벌이다. 말하자면 가택연금생활인 것이다. 훗날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를 가서 생활한 곳이 동계가 위리안치 된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에, 추사는 대정현 사람들에게서 동계의 유배생활이 어떠했는지 소상히 전해 듣고 동계의 선비다운 처신에 감동을 받은 것 같다.

추사는 제주 귀양이 풀린 후 일부러 이곳 거창의 동계고택을 방문하여 당시 동계 후손인 정기필에게 동계 선생에 대한 제주도민의 칭송을 전하고 ‘충신당(忠信堂)’이란 현판을 써주고 갔다.

선비의 품격이 묻어나는 사랑채 마당. 사랑채는 한옥의 멋과 예술적 극치를 보여주며 정면 여섯 칸, 측면은 툇마루가 붙어 있는 두 칸 반의 규모다. 누마루에 있는 눈썹지붕이 특별한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사진: 김정중 거창군청 주무관>

동계의 충절이 존경받게 되는 또 한 번의 사태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어났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선비의 자리에 있었던 동계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사신에게 항복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해 이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결국 화의가 성립되자 동계는 칼로 배를 긋는 할복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주위의 제지로 할복이 실패한 동계는 이후 세상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금원산 모리(某里·아무도 모른다는 뜻)에 은둔하여 서릿발 같은 절개를 지킨 어른이다.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고 미나리와 고사리만 먹고 살았던 은거지는 채미헌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계의 제사에는 항상 미나리와 고사리를 올려 정온 선생의 높은 기개를 되살리고 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기개와 충의를 숭모하여 남계서원 등 여러 서원에 배향하였고 정조(正祖)는 충정을 기리어 칠언절구 한수를 하사하였다.

日長山色碧嵯峨 (일장산색벽차아)
세월은 흘러도 산은 푸르고 높으며

鍾得乾坤鄭杞多 (종득건곤정기다)
정의로운 기운은 온 천지에 가득하네

北去南來同一義 (북거남래동일의)
북으로 가나 남으로 오거나 의리는 매한가지인데

精金堅石不曾磨 (정금견석부증마)
금석같이 굳고 정결한 절개는 아직도 삭아 없어지질 않네

※ 북으로는 윤집이 청 심양에 갔고, 남으로는 정온이 모리에 왔음

사랑채 마루에서 메주를 말리는 모습.

정씨 집안에서는 동계라는 인물이 집안을 명문가로 올려놓는 치세를 이루었다면, 동계의 현손인 정희량(鄭希亮)은 정씨집안을 존폐의 기로에 몰아넣은 일대 난세를 기록했다.

정희량은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의 주동자였다. 무신란은 조선후기에 발생한 반란사건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거기에 가담한 충청의 이인좌, 영남의 정희량, 전라도의 나숭대 등 내로라하는 명문 집안들을 거의 멸문 또는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이다.

무신란의 여파로 20년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정씨 집안을 다시 일으킨 인물은 영양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1800~1860)이다. 야옹 이후로도 계속해서 인물들이 배출되면서 정씨들은 과거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부산시장과 경상남도지사를 지낸 정종철 역시 동계의 후손이다.

마을 어귀에 흐르는 위천의 맑은 물을 건너면 멀리 덕유산이 보이고 가까이 노송이 흐드러진 언덕 아래 웅장한 기와집이 줄지어 나타난다. 강동마을 정면 중앙에 위치한 집이 정온 선생의 종갓집이다. 여느 사대부 가옥의 격식에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집 모양새이다.

인조가 내린 정려와 솟을대문.

‘문간공정온선생고택지문(文簡公鄭蘊先生古宅之門)’이라 쓰인 붉은 현판이 달린 문간채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사랑마당이 나타난다. 사랑채의 상량문을 보면 ‘숭정기원후사경진삼월(崇情紀元後四庚辰三月)’이라 쓰였으니 순조 20년(1820)에 건립된 목조주택이다. 사랑채에는 모와(某窩·모리의 집)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1909년 의친왕 이강(李堈·1877~1955)공이 이집 사랑에서 머물며 남긴 친필이다.

의친왕은 구한말에 승지를 지낸 이 집안 종손 정태균과 한양에서 친하게 지낸 인연으로 이 집을 찾았던 것이다. 의친왕이 사랑채에 머물고 있을 때 거창 인근은 물론이고 남원, 무주, 진안, 장수에서까지 임금을 보겠다고 사람들이 몰려와 뜰 앞과 문밖에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몇 년 전에는 이강 공의 아들인 가수 이석이 종택을 방문하기도 했다. 사랑채에 들어간 이석 씨는 감회어린 눈물을 글썽거리며 아버지가 요를 깔고 자던 방바닥에 대고 몇 번이나 절을 했다고 한다.

옛 선비들을 흉내 내어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앉아 고운 창살을 열어젖히니 한눈에 기백산과 금원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겹겹이 다가온다. 다시 누마루 동쪽 창을 여니 위천의 맑은 물이 눈과 귀로 들어온다. 이쯤에 이르니 정온 선생의 시조 한 수가 절로 떠오른다.

책 덮고 창을 여니 강호(江湖)에 배 떠있다.

왕래백구(往來白鷗)는 무슨 뜻 먹었는고

앗구려 공명(功名)도 말고 너를 쫓아 놀리라.

선생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만한 수려한 경관이 창 너머 펼쳐져 있다. 다시 누마루를 내려와 대문간에 서서 사랑채를 보니 매우 화려한 자태이다. 누마루 부분은 겹지붕을 둘렀고 이를 활주로 받쳐 더욱 화려하고 창살의 문양도 극히 우아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힘차고 묵직한 댓돌과 사각기둥은 반대로 위엄을 더하여 겉모습의 묘한 조화를 자아내고 있다.

품으로 안기려는 듯 보이는 사랑채.

현재 동계고택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정온의 14대 종부인 최희 여사와 15대 종손인 정완수 선생이다. 동계종택에서 종손인 정완수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종손의 어머니이자 14대 종부인 최희(崔熙·95) 여사다.

최희 여사는 경주 최부자로 유명한 최준 어른의 손녀로 1940년대 경주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 14대 종손인 정우순은 거창여고 교장과 거창교육장을 마치고 종택을 지키다 타계하였다. 15대 종손 정완수는 경북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은퇴 후 고향에 돌아왔다.

고택에 돌아와 사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1500평 대지에 70칸 건물이 있는 저택을 쓸고 닦는 일만해도 그렇다. 저명한 고택이기에 지나가는 방문객을 비롯하여 이곳저곳에서 항상 많은 손님들이 찾아온다. 손님접대가 종손에게는 가장 큰 일이다.

이집 뿐 만아니라 전국의 유명한 종손들이 직면하고 있는 공통적인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특별히 재산이 많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종손들이 집을 지키면서 살기가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행히 지금은 문화관광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철우 본지 회장  lc34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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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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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경호 2020-09-11 21:18:52

    깊이있는 기사에 감사드립니다ㆍ 애향심은 고향땅에 깃던 역사와 인물들이 남긴 이야기를 소개해줄때 한층 깊어질것입니다ㆍ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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