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름한 벽을 우직히 지키고 있는 빨간 우체함. ⓒ정은영

우편배달부를 기다리시나요? 저는 이사한 집으로 올 편지를 기다리거든요. 바뀐 주소도 알리지 않았으면서 편지를 기다리는 거예요. 보내고 싶은 편지를 아직 부치지도 못했으면서 답장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리다 기다리다 아예 우편배달부를 따나 나섰답니다. 지리산을 올려다보는 곳, 함양 마천 우체국으로. 긴 가을 가뭄 끝에 먹장구름이 벽소령을 넘어 장마비로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함양, 마천우체국에서

9시가 넘어 선 아침, 마천우체국 집배원 네 분이 우편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소보다 좀 늦게 도착한 우편차는 우체국 뒷마당에 우편물자루와 소포를 내려놓고 가버렸습니다. 우편물은 집배실로 옮겨져 담당구역별로 나뉩니다. '내 것처럼 소중히, 완전 소통 이루자'라는 표어가 어찌 그리 절실하게 느껴지던지… 27년 집배원 최장식 님과 우편물을 분류하며 함께 할 하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읍평·금계·원정·창원·등구·양전·촉동… 창원부락이 제일 커. 100∼150가구 정도 돼. 옛날에는 마천면보다 더 컸다고 하니께. 800고지 오도재까지 가야 되요. 여기는 벽지에다가 지리산이라 외지에서 건강 관련, 수양한다고 외딴 곳에 집을 지어놓은 사람들이 많아 배달 소요시간도 더 걸리고 위험성이 많아." 1200∼1300가구 되는 이 지역을 맡은 때가 지난 4월입니다. 2년마다 배달 지역을 바꾸기 때문이지요. 겨울엔 얼어버린 눈밭을 다니기 때문에 '아차'하는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우편물들은 지역신문과 농민신문에 광고지, 요금청구서, 학습지가 대부분입니다. '시골집배원은 신문배달부'이기도 하답니다. 분류를 하다보니 요즘 손으로 주소를 쓴 편지가 드물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최장식 님 앞으로 보내온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뜯지 않고 한 켠에 그냥 놓으시길래 여쭸더니 고3 딸아이 담임선생님한테 온 성적표라 합니다.

우편물을 분류함에 동네마다 넣은 뒤, 다시 배달하는 순서대로 정리하고 끈을 묶습니다. 우편물이 많을 때는 끈 묶는 기계를 쓰기도 하지만, 님은 서랍 속 모아둔 낡은 끈을 사용합니다. 등기우편에는 알림장을 따로 붙이고, 소포도 챙기고, 우편물을 오토바이 뒤 빨간통에 실으면 배달 준비는 끝입니다. 한 분, 두 분 오토바이를 타고 우체국을 떠납니다. 은행잎이 집배원실 문턱에서 서성거리는 11월, 아침입니다.

▲ 우편물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 ⓒ정은영

우편배달지에서 만난 사람들

말이 꼬리치며 하늘을 달리는 모습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마천'에는 지리산 여섯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임천강이 되어 흐릅니다. '마천소'라 하여 옛날에는 '경제특구' 같은 곳으로 목기, 옻, 한봉, 마천곶감이 널리 알려져 있다지요. '등구 마천 큰 애기는 곶감깎이로 다 나갔다'는 민요가 있을 정도입니다.

오늘, 우편물을 처음 배달하는 곳은 '마천석재', 화감암으로 검은 빛을 띠는 마천석을 가공하는 공장입니다. 까만 원석들이 원시의 거대한 고인돌처럼 누워 있는 공장 한 구석에는 벌써 작은 난로가 나와 있습니다. 우편물을 전하고 나온 최장식 님이 급히 우체국으로 되돌아가 비옷을 챙겨 오셨습니다. 비가 내릴 모양입니다. 비 오는 날의 우편배달은 여간 복잡한 게 아닙니다. 얼굴에 들이치는 빗줄기도, 종이 우편물과 소포들도.

의탄대교를 지나면 칠선계곡으로 가는 첫 동네, 의평마을이 있습니다. 그 입구에 함양군에서 제일 오래된 620년 묵은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킵니다. '새장터'라 불렀던 이곳은 하동나루에서 소금을 싣고 벽소령을 넘어와 장을 보던 곳이라 합니다. 이제는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최장식 님은 마을을 한바퀴 돌며 우편물을 전합니다. 7년 전 배달을 하다 이 마을 다리 위에서 차와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 뒤 무릎이 안 좋아 보호대를 차고 배달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편배달부들은 무릎이 좋지 않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마지막 주유소'라는 입간판이 달린 추성 주유소에도 우편물을 전했습니다. 채석장을 지나면, 조선시대 창고가 있던 창원마을에 들어섭니다. 예쁘게 깎은 감이 집집마다 매달려 곶감이 되어 가는 철, 마을 개들이 짖어 우편배달부의 도착을 알립니다. 150여 가구가 아직도 돌담을 사이에 두고 거북이 등 같은 산자락에 들어앉아 있지요.

'가로등설치공적비'를 세웠을 만큼 지리산 품에 기댄 마을들은 세상과 참 멀리도 떨어져 있었나 봅니다. 함양만 해도 전주를 거쳐 8시간이 걸리는 곳이었으니까요. 지금은 대전과 진주로 고속도로가 이어져 3시간이면 된다 하네요.

비가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 동네 할머님 한 분께 인사를 드렸더니, 대뜸 하시는 말, "밥은 어쨌어? 희한하지 그재? 요동네 커. 그전에는 더 컸는데, 다들 객지로 가고. 안작 결혼 안했재? 스물은 넘었지?" 열다섯에 시집 온 김서분 할머님은 십 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혼자 살고 계시다구요.
따지 못한 고추와 수수가 말라 가는 밭 옆에서 마을 분들이 모여 감을 깎으며, 서두르되 분주하지 않게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편배달부가 이어서 들린 곳은 양전마을 폐교, 토봉하는 부부에게도 우편물이 왔습니다. '시집, 장가 싹 다 간 자식들'과 오래된 삶터를 떠나 이곳에서 꿀 담는 새 인생을 살고 계십니다. 아예 장마비처럼 쏟아지는 빗속을 달려 최장식 님은 등구마을로, 별악수마을로 갑니다. 흐린 빗속에서 오토바이와 뒤에 실은 우체함 빨간색이 선명합니다.

지난 달, 새로 길이 난 오도재에서 잠시 비를 피하며 늦은 점심을 했습니다. 평소에도 두세 시나 돼서야 빵으로 점심을 대충 드신다고 하네요.

"함양읍에 살았는데 이런 산골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처음엔 염소도 키우고, 배추 오이농사도 지어보고 했는데 안됐어요." 오도재 물레방아 산장 여주인이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초등학생 자녀 둘을 키우는데 불안하다구요. 함양읍만 해도 아이들이 학원 마치고 돌아오면 밤 9시고, 고속도로 타고 20분이라는 진주까지 학원을 보내는 부모도 있답니다. 도시와 농촌이 교육열과 위성방송과 인정사정 없이 뚫린 도로로 하나 되는 대한민국의 오늘입니다.

▲ 장봉건 님. 우편배달원 최장식 님께 토봉소포를 부칩니다. ⓒ정은영

우편배달부와 시인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우체국에는 편지를 보내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마을 우편함에서 꺼낸 편지들에 소인을 찍고, 받아온 택배를 부칩니다. 하루에 이런 우편물은 10통 정도라구요. 오늘은 서울 동대문 한약집으로는 꿀을, 자식들에게는 청국장을 부칩니다. 집배실로 돌아와 몇 가지 기록을 하며 다시 보낼 우편차를 기다립니다. 최장식 님이 오늘 오토바이로 달린 거리는 32킬로미터. 소포 때문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 5∼60킬로미터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제서야 아침에 받은 딸의 성적표를 뜯어봅니다. 초등학교 때 골수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딸은 다리관절에 쇠파이프를 넣고 학교를 다녔답니다.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은 딸아이는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닳았을까요.

그날 저녁, 그이는 빗길을 달려 함양읍으로 갔습니다. '지리산문학회' 사람들과 올 봄부터 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오십을 앞둔 우체부와 시라… 님께 어떻게 시가 찾아왔을까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그 날, 눈 왔었구만. 마산에서 직통을 타고, 비포장도를 달렸는데 눈이 있어 차가 못갔지. 버스에서 내려 삽으로 눈 치우면서 갔어. 아이고 참나, 24살이었지…."

1979년 12월 8일, 그이는 마천우체국으로 옮겨왔습니다. 푸릇푸릇하던 24살에 집배원이 된 최장식 님은 마산우체국에서 일하다 고향인 순창이 가까운 곳으로 오기 위해서였지요. 3년이면 옮기는 내무직에 비해 집배원들은 원하기만 하면 한 곳에 오래 있을 수 있다 합니다.

처음 2∼3년 자전거로 배달을 했답니다. 비포장도로에 길도 경운기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구요. 그 뒤 중고 오토바이를 탔는데, 세 대를 갈아탔을 정도로 산길은 높고 깊고 험했습니다.

"처음 왔을 때는 편지가 많았어. 지나가며 편지가 없어지대. 고지서들, 광고물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우편물이 많아졌어. 지금은 어쩌다 하나씩 나와. 펜팔편지, 연애편지인지는 몰라도. 옛날에는 고지서도 한 달에 한 번 집집마다 나왔는데, 휴대폰요금, 이거 겁나지, 뭐 달아가지고 텔레비전 시청료 나오지. 지방세, 토지세 그런 것들 판치고, 또 유별나게 교통위반 딱지도 많아. 옛날에는 군대간 자식에게서 소포 같은 거 오면 붙들어 울고, 그런 소포를 줄 때는 마음에 각오를 하고 주구마. 저 사람 얼마나 붙들고 울까. 참 안쓰러웠지…"

점점 홀로 사는 어르신들이 늘어나면서 고지서도 내드리고, 장날에는 생선도 사다 드리고, 사료, 비료도 실어 날랐습니다. 외딴 동네 배달만 하는 '청부집배원' 이 있던 시절, 전화교환원이 많을 때는 열 명이 우체국에서 같이 일했다고 합니다. 처녀교환원들과 총각집배원들의 가슴 뛰던 시절이었겠지요. 그러다가, 시가 찾아왔습니다.

"들에 산에 내가 이름도 모르는 작은 꽃들이 남이 알아주든 말든 간에 피고 시드는 것을 배달하며 보았지. 살다보니 시련이 오면 시가 받침이 되더라구. 보이지 않는 힘이 있더라구."

눈덮인 산골마을 외딴집쪽으로 나보다 먼저간 고라니 발자국
삶의 무게로 푹 패인 발자국들따라
집배원의 발자국이 일부인으로 찍혀가고 있다.
-고라니 발자국따라(최장식)에서-

소포 부치고 싶은 날

다음날 아침, 비 그치니 지리산 반야봉이 눈 앞에 있습니다. 의탄마을로 다시 찾았습니다. "손자가 오굴오굴해, 며느리를 셋 보고 사위 둘 보고 손자가 꽉 찼어." 18살에 시집와서 100살이 다 돼 가도록 안 죽어 큰일이라는 신순이 할머님(93세)은 대청마루에서 자식들에게 줄 김장을 담기 위해 마늘을 까고 계셨지요. 최장식 님을 아시냐고 여쭈니, "우리는 체부한테 꼭 부치. 잘 부치 줘." 하십니다. "여기 사니 좋제, 때 묻은 데가 좋지. 저 산에 움막을 쳐서 살아도 좋아."

독감예방주사를 맞으러 보건소에 가셨다는 아들 장봉진 님이 오셨습니다. 그이는 열 마지기 남직한 논을 일구며 여전히 쭉진 머리 고운 어머님과 6대째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 해 한 해 '아무리 사람이 들어가도 다 채워지지 않는 널찍한 곳' 으로 가실 날이 다가오는 것만 같아 서글픕니다. 마침 들른 '체부' 최장식 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함양으로 가려면 오도재를 넘어 40리를 걸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관광철이면 마을은 차들로 넘치는 주차장이 된다고 합니다.

"여기 사람들은 먼지만 먹었어. 우리는 농사 짓고 사는 사람들이지. 예전에 전부 앞에서 물을 떠먹고 살았어. 가재가 바글바글했어. 일급수에 사는 거 아이가? 고기도 물먹고 가재도 물먹고 우리도 물먹고 그래 살았는디, 더워서 물에 들어가면 들어가서 흘씬 물먹고 멱감고 그랬는디…"

당산제를 지내지 않는 지도 10년쯤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떠나가고, 마을은 축제를 잃어버린 게지요. 예전에는 음력 정월 3일에 마을 사람들이 얼음물로 새벽에 몸 씻고 머리 감고 지성으로 당산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날은 끝나도록 화장실에도 못 갔다지요. 시루떡해서 방앗간에서 찧고, 두루마기까지 차려 입고 호롱불 들고 웃당산, 중간당산, 아랫당산까지 지내면 닭이 울었답니다.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갔지만 느티나무 잎들은 그곳에서 바람개비가 되어 돌고 있습니다. 홀로 사는 어르신 손때 묻은 집, 가마솥에는 시래기 삶는 냄새가 퍼집니다. 밭에는 배추속이 꽉 채워졌습니다. 마음은 이미 자식들에게 가 있고, 부칠 소포는 마천우체국에 쌓여갑니다.

때가 되면 알아서 수세미 넝쿨손 뻗친 기운이 연상 내 어머니다
넓적한 잎사귀 보이는 대로 감아올려 집 한 채 누르고
짱짱하던 여름 뭄뚱이 덮어준 옷 조각 무게도 되지 않지만
그 안의 사람들 시원했을게다
끈적이면 열매 입 속으로 혈을 타고 곳곳에 온기 불어 넣고
빳빳이 말린 수세미 일년 치 살림밑천이다
눌러 불고 때가 탄 얼룩들
시퍼런 손놀림 한 번 훑고 가면 깜쪽같다
나는 천원이면 된다 슈퍼에 가서 용도와 크기대로 고르고 담기만 하면
내 어머니 내 발품의 몇 천배를 오르락내리락 하고도
똑같은 모양하나 만들지 못하고 올해도 어김없이 보내왔다
-전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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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12월호에 실린 정은영 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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