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이념과 진영으로 갈라진
우리나라의 현실과 닮아
결국은 평가의 문제

동계는 역사 속 인물 아니라
현재에도 되살려야 할 인물

역사적인 상황과 직면했을 때 지식인이 대응하는 방법은 어떨까.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참으로 선택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지난 16일 거창문화원에서 열린 학술대회 ‘동계 정온의 교유활동과 용산범국회의 지역 문화사적 의의’는 이런 단면을 잠시라도 엿볼 수 있는 좋을 자리가 되었다. 신념을 가진 지성의 강렬함이 시대 앞에서 어떻게 달궈졌는지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1592년부터 1637년까지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역사적으로 가장 혼란스럽고 치열하기까지 했다. 전쟁 앞에서 삶과 죽음이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대의 부침과 함께했다.

특히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은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 조선의 운명을 두고 화친과 척화로 47일간 이어진 논쟁은 38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많은 의미를 갖게 한다. 엄혹한 현실 앞에서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대한민국은 여전히 또 다른 위기에 서 있다. 패권국 미국과 신흥 강국 중국의 경쟁 때문이다. 중국이 ‘일대일로’로 치고 나가자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맞불을 놓았다. 그 와중에 일본의 경제보복 문제, 사드 문제, 방위비 분담 문제 같은 온갖 난제들이 뒤엉켜 있다.

이날 학술대회는 국제적인 쟁점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념과 진영으로 갈라진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듯 머릿속에서 늘 떠나지 않았던 상상과 질문이 발제와 토론으로 여지없이 쏟아져 나왔다. 용산범국회는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에서 중양절(음력 9월9일)에 정온 선생을 중심으로 선비들이 학문을 토론하고 시국을 논의한 모임을 일컫는다.

다섯 가지 주제발표가 끝난 후 토론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 거창문화원>

발제는 조구호 경상대 강사의 사회로 다섯 가지 주제발표로 이뤄졌다. △임란 이후 영남 지식인의 사상적 동향과 감성의 유형(정우락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동계 정온의 생애와 교유활동양상의 일면 고찰(강구율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범국회의 유래와 거창 용산범국회의 전개(박기용 진주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용산범국회 계회로 본 조선중기 거창유림의 교유 현황(손병욱 경상대 윤리교육과 명예교수) △용산범국회 계회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구진성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연구원).

종합토론은 좌장 김낙진 진주교대 도덕교육과 교수의 진행으로 정시열(영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재명(남명학연구원 연구원) 김종구(남명학연구원 사무국장) 이상호(경상대 윤리교육과 교수) 박동일(한국국학진흥원 전임연구원) 교수진이 토론에 참가했다.

동계 정온(1569~1641)은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적들과 맞섰다. 1637년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조판서 최명길 등은 청과의 화친을 주장했으나, 이조참판 정온은 예조판서 김상헌과 함께 이를 매국으로 보고 강력하게 척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한 정온은 칼로 자결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637년 1월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덕유산 모리(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서 은거하다 1641년 생을 마감했다.

“동계 정온은 역사적으로나 개인사적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굴곡진 시대를 꿋꿋하게 살아낸 지신인이자 문학인이다.” (정우락 경북대 교수)

“동계는 선조 초기에 출생하여 광해군을 거치고 인조 때까지 생존한 사람이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몸소 겪은 전쟁만 하더라도 1592년 임진왜란, 1597년 정유재란, 1627년 정묘재란, 1636년 병자호란 등 조선 전체를 보았을 때 가장 큰 전쟁을 모두 겪었다.” (강구율 동양대 교수)

“동계는 광해군 시절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에게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동계는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에 위리안치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10년 만에 유배에서 풀린 동계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강화도가 함락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며 남한산성에서 칼로 자결하려 했지만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손병욱 경상대 교수)

동계는 임란 후 1630년 모친상을 당하자 가북 용산에 장사지내고, 묘 아래서 시묘하다가 1632년 용천정사가 완공되자 제자들을 모아놓고 강학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1636년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됐다.

“이런 과정 속에서 동계가 68세였던 1636년 음력 9월9일 안음·합천·삼가·현풍·거창 선비 21명이 용산 낙모대에서 모여 범국회를 조직하고, 매년 한 번씩 이곳에서 계를 갖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1641년 동계 선생이 생을 마치면서 용산범국회는 중단됐다. 이 모임이 다시 속계된 것은 1900년 후손들에 의해서였다.” (구진성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연구원)

동계 선조의 학맥이 함양의 일두 정여창 가문과 닿게 된 것은 거창 용산에서 외가마을 함양 개평으로 이주한 동계의 6대조가 하동 정씨의 딸을 맞이하여 혼맥을 잇게 되면서부터다. 함양 남계서원 창건에 앞장 선 개암 강익은 동계 문중과 혈연의 맥을 넘어 학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숙종 때 ‘정여창-강익-정온’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동계는 퇴계 학통도 이어받았다. 퇴계 학파로는 ‘퇴계-조목-정온-조경·허목-이익’으로 이어지는 기호 남인의 학통을 계승했다. 동계의 삶에서 그가 경(敬) 사상을 통해서 내면을 곧게 하고, 의(義) 사상을 현실에서 실천하여 경의(敬義) 사상을 실현하려고 한 태도는 남명학파의 학통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박기용 진주교대 교수)

지난 16일 거창문화원·남명학연구원 주관으로 열린 동계 정온 선생과 용산범국회 학술대회에 참가한 발제자와 토론자들이 함께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거창문화원>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죽이고, 서모인 인목대비를 폐한 죄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정묘·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면서 끝까지 싸울 것을 강조하다 화의가 결정되자 자결을 시도했던 일 등을 볼 때, 동계는 남명학파로서 의식이 확고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용산범국회를 결성하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로 보인다. 광해군의 실정과 호란을 당하여 청에게 대항하는 방식에서 정치적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 후학을 지도하며 학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혼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 외세에 맞서 결속하려는 의도로 역사·문화적 공동체의 성격도 끼고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동계 정온의 역사는 오늘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 시대는 그 시대의 논리와 상황이 있다. 현재를 사는 이들의 인식으로 재단하면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다. 명과 청나라가 벌이는 패권 다툼, 미중일이 벌이는 암투도 병자호란 이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명분이냐, 의리냐. 결국은 평가의 문제다.

동계는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도 되살려야 할 정신을 가진 인물이다.

이영철 기자  achimsto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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