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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출현’ 대통령제 권력구도에서 한국정치의 현실

사람이든 나라든 흥망성쇠를
피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
성(盛)할 땐 반드시 경계해야

정치는 수사의 함의가 중요해
국민이 얼마나 공감한지 핵심

한국 중도층은 정당 이념보다
인물론을 선호하는 경향 여전

지지층을 결집하는 과정에서
중도에 대한 메시지를 놓치면
대선으로 행보는 어려워질 것

2021년 새해 첫날,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전역의 지상·해상·공중 대비태세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가장 뾰족한 송곳이 먼저 무디어진다. 맛있는 샘이 먼저 마른다. 곧게 뻗은 나무가 먼저 잘리는 이치도 같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묵자(墨子)는 비간, 맹분, 서시, 오기의 비참한 최후가 뛰어난 재주에서 비롯되었음을 위와 같이 비유하였다. 사람이든 나라든 흥망성쇠를 피할 수 없고, 특히 너무 성(盛)할 때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2020년 총선 당시 통합미래당(현 국민의힘)은 집권 3년 차의 정부·여당의 세(勢)가 2018년 지방선거를 통해 이미 정점을 찍었다고 오판하였고 참패했다. 대선과 지방선거, 그리고 총선까지 승리한 여당이 정국을 주도하는 모습은 매우 정상적이다. 그런데도 빠르게 하락하는 대통령 지지율과 여당의 그것을 보면 지금의 현실이 뭔가 부조화하다. 언뜻, 묵자의 가르침과 같이 너무 성하면 지킬 수 없는 것처럼 정부·여당도 그렇게 보인다.

여당의 주류를 산업화세력의 반대 의미로, 땀 흘려 일하지 않은 이른바 ‘586민주화세력’이라고 폄훼하며 그들은 실체 없는 말뿐이라는 비판이 많으나 이러한 사고는 위험하다. 정치는 원래 말의 향연이다. 그래서 변화무쌍하며 실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정치에서는 말 즉, 수사가 지닌 함의를 투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광고처럼 능동적이며 감각적인 선전에 기대를 걸지 않는 유권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쇼에 능하다는 비판이 오히려 정권에 대한 칭찬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까닭이다.

수사는 정권 또는 인물의 철학을 상징하며 방향성을 제시한다. 소련의 스탈린이나 중국의 마오쩌둥, 북한의 김일성, 한국의 박정희 모두 진위와 관계없이 훌륭한 수사를 주입하였기에 장기통치가 가능했다. 각종 매체에서 쏟아지는 정보의 범람을 견디며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민주체제에서 수사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 결국, 수사에 내재한 철학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수사가 어떠한 이유로 어떻게 변화하는지가 관건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청와대 여민1관에서 서울·세종청사 국무회의실과 영상회의로 새해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87년 이후 모든 세력은 저마다의 확고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노태우 정권의 철학은 생존과 전환이었고, YS는 문민통치에, DJ는 외환위기 극복이 주안이었다. 노무현 정권은 권위주의의 완전한 퇴장을 추구하였고, MB는 1991년에 마침표를 찍은 고도성장의 부활을 외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독특한 경우지만 결국 박정희라는 향수와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자극하는 데 성공하며 집권하였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시대정신에 맞는 수사를 앞세워 지금의 자리에 있다.

정국의 흐름에 따라 정권창출의 수사와 그 이후의 어조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핵심은 이 변화가 합당한지, 또 국민이 얼마나 공감하는 가다. 이 두 가지를 두고 볼 때 문재인 정부는 확실히 실패했다. 정권의 경제기조를 대표하는 ‘소득주도성장’, ‘한반도 운전자론’이란 국제정치학적 수사, ‘K-방역’으로 일컫는 코로나19시대에 대한 레토릭 등이 모두 대안 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실력을 넘어 철학의 부재를 대표한다. 만약, 앞의 수사가 유연하게 변화했다면 대통령·여당의 지지율이 이처럼 급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여당의 세는 날카로움을 잃은 송곳과 같이 그 성함을 끝으로 무너질 것인가.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것이 정치의 상대성이다. 현직 대통령의 가파른 지지율 하락과 비교해 제1야당의 그것은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이는 우리 정치의 특성에서 기인하는데, 한국 중도층은 정당의 이념적 성향보다 인물론적 접근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여전하다.

YS, DJ와 같은 군사독재에 대한 항거, 비주류의 상징 노무현 대통령, 과거와 달리 중도층과 중산계급이 일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샐러리맨의 신화가 통했던 MB 등 ‘87년 체제’ 이후 계속된 ‘거인의 시대’가 이어질 것이란 믿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권자의 기대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사실상 무한한 한국의 권력구도에선 오히려 거인의 출현을 바라는 유권자가 현명하다.

여야 지지율은 비로소 균형이 잡혔다. 남은 것은 오 할에 가까운 중도층의 향방이다. 중도층은 상기한 바와 같이 거인에 집중한다. 진영에 대한 평가는 인물과 그가 내세우는 수사에 의해 밀려나기 쉽다. 선거는 인물과 구도가 기본인데, 차기 대선에서의 구도는 이번 안철수 대표의 서울시장 출마로 큰 틀에선 정리될 것으로 본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바른정당의 실패로 새집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고 있다. 결국 구도는 여당과 제1야당으로 편성될 확률이 높다.

여당엔 눈에 띄는 차기 주자가 둘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낙연 대표다. 이재명 지사의 경우 자신만의 확고한 지지층이 돋보인다. 거기에 정치적 수사도 상당하다. 수사와 정치행보가 거의 일치하는 점도 강점이다. 비추어보건대 YS나 DJ와 같은 저돌적 캠페인이 가능하며 당내 주류세력과 타협 시,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드라마도 기대할 수 있다. 이낙연 대표는 안정감과 진중한 이미지가 좋다. 집권 초기 국무총리로서 직무도 흠잡을 데 없이 잘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일정한 틀에 갇혀 있다. 현 정권과 결을 같이 하는 그의 수사는 독자적이지 못하다.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처럼 5공 청산이란 승부수를 던질 수도 있겠으나 치열할 당내 경선을 생각하면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 둘 다 경선, 본선에서 지금과는 다른 수사를 표출할 가능성이 있다. 그때 주목할 점은 상기(上記)한 바와 같이 누가 얼마나 더 질서 있게 수사를 변주하여 국민의 공감을 얻어낼 것인가다.

지난해 11월 이틀간 화상회의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모습. <사진: 청와대>

이러한 관점에서 야권은 답답해 보인다. ‘새정치’의 대명사 안철수 대표마저 ‘반문’ 외에 뚜렷한 수사가 없다. 오세훈·나경원 전 의원을 비롯한 많은 야권의 인물들은 서울시장, 전당대회, 대선 등 여러 선택지를 놓고 침묵 중이다. 현재 이들의 행보를 보면 대선에 대한 강한 권력욕을 찾기 어렵다. 침묵도 수사의 한 방법이지만 자신감의 결여로도 읽힌다. 야권에서 가장 대권에 대한 의지가 강렬한 인물은 무소속 홍준표 의원임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홍 의원도 한계에 봉착해 있다. 보궐선거까지 복당이 차단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지층에 대한 호소일 것이다. 그러나 지지층을 결집하는 과정에서 중도에 대한 메시지를 놓치면 대선으로의 행보는 어려워질 것이 틀림없다. 신념이라는 그의 수사는 이미 지난 대선에서 부정적 평가받았다고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미학적으로 변주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18세기 영국 휘그당엔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상상력을 가진 인물이 역사의 궁극적 방향을 결정’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이는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아직은 야당보다 여당의 인물이 더 적합하다. 특히, ‘쇼에 능한’ 여당은 중도층이 가진 정치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총선압승에 비해선 여세가 꺾인 것은 분명하지만 날카로움을 완전히 잃었다고 단언하기엔 어렵다. 그러므로 아직 여당은 다음 대선을 지킬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다만, 그들이 외쳤던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란 수사 속에 자신의 이익보다 보편적 원칙으로 만인에 대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묵자의 역설(力說)이 깃들어 있길 바랄 뿐이다.

/한의준 칼럼리스트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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