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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공격에 주인 지키기 위해 싸운 ‘소, 헌신과 의리’신축년 소띠해
  • 이철우 본지 회장
  • 승인 2021.01.10 18:46
  • 호수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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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가축
농경사회서는 부와 재산을 상징
소 담당 꼴머슴 둘 정도로 귀해

소는 한해 농사와 풍년을 상징
힘든 일 묵묵히 해내는 모습은
우직과 근면함, 자기희생 상징

거창 우혜마을 소의 헌신·의리
함양 구시골은 구유에서 비롯

옛날 경상북도 선산 고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농부가 산에 있는 밭에 가는데 어디선가 호랑이가 나타나더니 공격해왔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미처 피하지 못하고 호랑이에게 물렸다. 이 때 밭을 갈던 소가 주인을 구하기 위해 호랑이에게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싸운 끝에 호랑이를 물리쳤다. 소는 근본적으로 순박한 동물이지만 때에 따라 크게 흥분하여 싸우기도 한다. 뒤늦게 사람들이 달려와 농부를 구해 주었으나 호랑이에게 물린 상처가 너무 깊어서 농부는 끝내 죽고 말았다.

농부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소는 의로운 소이니 팔지도 잡지도 말고, 죽더라도 고기를 먹지 말고 나와 함께 묻어주시오.” 그런데 주인이 죽자, 소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어떤 음식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는 사흘 만에 따라 죽었다. 이에 사람들이이 감동하여 주인 곁에 무덤을 만들어 주면서 의우총(義牛塚)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조선 시대 세종 때 발간된 <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실화로서 소가 얼마나 충직한 동물인지 잘 일러 주고 있다.

소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가축중의 하나이다. 기원전 6000년쯤 서남아시아와 인도에서 인간에 의해 길들여졌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눌지왕 22년(438년) 백성에게 소 수레끄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고, 지증왕 3년(502년) 소를 써서 논밭을 갈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는 농사일을 돕는 매우 중요한 가축으로 농경사회에서는 논·밭과 함께 부와 재산을 상징하는 농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다. 소 담당 꼴머슴을 둘 정도였다. 목돈이 생기면 소 들어온다고 기뻐했다. ‘소 팔아 자식 대학을 보냈다’는 말처럼 소는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비상금고의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비꼬아 부르기도 했다. 농가에서 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소를 아끼고 보살펴야 집안과 마을이 편안하고 번창한다고 믿어왔다. 농촌의 하루 시작은 소여물을 주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마무리는 마굿간에 짚을 깔아 따뜻하게 잠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십이지 축신(十二支 丑神). 소를 신격화하여 표현한 그림으로, 얼굴은 동물이고 몸은 사람인 반인반수(伴人半獸) 모습이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소는 12지(十二地)라 하여 12동물을 나타내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두 번째 동물(丑)로 오전 1~3시는 축시(丑時), 북북동은 축방(丑方)을 뜻한다. 소의 느린 걸음과 큰 몸짓, 힘든 일도 묵묵히 해내는 모습은 우직함과 근면, 자기희생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목동이 소를 타고 가는 그림에선 세속을 벗어난 여유가 느껴지고, 문학 작품 속의 소는 고향의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절에 가면 사찰 벽면에 ‘사람이 소를 타고 가는 그림’을 간혹 볼 수 있다. 손에 고삐만 들고 있는 사람이 소를 찾는 모습, 처음에는 검은 소였던 것이 나중에는 흰 소로 바뀌는 등 대개 열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십우도(十牛圖)라고 한다. 십우도는 마음의 안정을 잃고 살다가 진리를 깨달은 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서 평안을 얻는 과정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그런가 하면 소 한 마리를 그린 ‘우도(牛圖)’와 목동이 소 등에 올라탄 ‘목우도(牧牛圖)’는 여유로운 삶을 상징한다. 옛사람들 중에는 소를 타고 유유자적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그런 정서를 담은 그림이 우도인 것이다.

소는 농사와 풍년을 상징하기도 한다. 정월 초하루 새벽에 소가 울면, 그 해는 풍년이라 여겼고 정월대보름에 찰밥·오곡밥·나물 등을 얹은 키를 소에게 내밀었을 때, 소가 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라고 점쳤다. 강한 힘과 요사한 귀신을 물리친다는 벽사(辟邪)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개업이나 이사를 했을 때 문 위에 코뚜레를 거는 풍습은 재물을 코뚜레처럼 꽉 잡아줘 가게가 번창하길 기원한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특징과 생활모습은 한국인의 정서에 녹아 있어 여러 관념과 풍속을 만들어 냈고 생활과 문화에 영향을 끼쳤으며 지명에도 다양한 형태로 반영돼 내려오고 있다. 김삿갓이 주유천하하면서 시골 장터에 관상(觀相), 수상(手相), 토정비결(土亭秘訣), 해몽(解夢)을 잘 한다는 점쟁이를 보자, 소도 생물이라 사주(四柱)가 있을까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해본다. 장난 끼가 동하여 어제 지나오면서 소가 새끼를 낳는 것을 본 것이 생각나 송아지 사주를 알려주면서 ‘이 아이의 팔자가 어찌될지 한번 보아 주시오’했다. 점쟁이는 김삿갓이 알려주는 사주를 종이에 써 놓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열심히 풀어나가다 별안간 붓을 내던지며 화를 내고 말았다.

“세상에 원! 이렇게 흉악한 사주가 있단 말인가!” “사주가 흉학하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오?” “초년 신수도 불길하거니와 마지막 쾌(快)는 말도 못하게 흉악하단 말이오!” “마지막 쾌는 어떻길래 흉악하다는 말이오?” “세상에! 오세봉액 타두종명(五歲逢厄 打頭終命) 즉 다섯 살 때에 액운을 맞아 머리를 두드려 맞고 죽게 되었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흉악한 사주가 어디 있느냐 말이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는 살아서 온갖 힘을 견디고 죽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람에게 준다. 소(牛)라는 동물은 살아 평생 농사짓느라 고생을 하다가 다섯 살쯤 되면 도살장으로 끌려가 쇠망치로 이마빼기를 얻어맞아 죽는 운명이 아니었던가. 점쟁이는 자신이 푼 사주가 송아지의 사주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만 아무튼 사주풀이 만큼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셈이었다.

심사정(1707~1769)의 목우도(牧牛圖) 수묵채색화.

국토지리원이 조사·발표한 전국의 고시된 지명을 보면 소와 관련된 지명이 732개로 용(1271 개), 말(744개)에 이어 세 번째로 많았다. 동학농민운동의 마지막 전투인 ‘우금치(牛禁峙) 전투’가 벌어진 충남 공주 우금고개는 소와 관련된 지명이다. 소도둑이 많은 곳이라 해가 저물었을 때 소를 끌고 고개를 넘어가면 소를 빼앗길 수 있으니 소를 끌고 넘어가지 말라는 뜻을 담아 우금(牛禁)고개라 지었다는 것이다.

경남 거창군 가북면 ‘우혜마을’은 맹수로부터 어린 아이를 구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인간을 위해 온 몸을 아끼지 않은 소의 헌신과 의리를 가진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함양군 수동면의 구시골 마을은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인 구유처럼 생긴데서 비롯되었다. 구유는 지역에 따라 구시, 구이, 여물통으로 불리고 있다. 구시골 마을은 주변에 역마봉과 와우형의 산이 있어 마을 앞에 연못을 파서 구시골이라 했다고도 한다.

풍수지리에는 소가 편안하게 누운 모양인 와우형(臥牛形), 소가 누워 한가로이 자고 있는 모양인 우면지(牛眠地)등은 명당이라고 여겼다. 소는 농민의 조상이라는 말도 있고, 소는 사람과 다름없는 영물이라고 믿기도 한다. 옛날 조상들은 입춘전후로 흙이나 나무로 만든 소 인형을 세우면서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고 풍년을 기원하였다. 소를 조상처럼 위한다는 의미에서 ‘소는 농가의 조상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소 꿈은 집안식구·집·재산·사업체 등을 상징한다.

소는 논밭을 가는 힘든 일을 묵묵히 대신해 주고, 때로는 운송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소를 내다 팔아 목돈을 마련하기도 하고, 또 고기와 우유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뿔과 가죽은 공예품으로 재탄생되어 일상생활에서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생활 속에서 널리 활용돼 온 소를 두고 ‘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릴 것이 없어 소는 하품밖에 버릴 게 없다’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철우 본지 회장  lc34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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