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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다운 공직생활 위해 아파하며 던진 말 “사표 내~”최용배 전 함양군 보건소장

주민이 어떠한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감정이입은 안 돼
설득하거나 느끼게 해야 해
그것이 프로답게 일하는 법

문화재위원 예술회관 반대에
20명 일일이 찾아다니며 부탁
부서 동료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해내겠다 일념이 설립 이끌어

어떤 이는 인생을 고해라 하고
어떤 이는 인생을 소풍이라 해
고마운 분들께 감사함 전하면서
소풍처럼 긍정적으로 살려고 해

최용배 전 함양군 보건소장이 정년퇴임과 동시에 배우자 정영선 여사와 함께 지리산 달궁계곡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수개월 전 볼 일이 있어 한 면사무소를 방문했다가 반가운 후배 공무원 몇 분들과 점심을 같이 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한 후배가 내게 하는 말이 “저랑 같이 근무할 때 ‘사표 내’ 라고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였다.

물론 나도 그 기억이 너무도 또렷하다고 말했다. 그때가 1998년 내가 상공운수계장 발령을 받아 갔을 때였다. 그 후배는 주차단속 사무를 맡고 있었는데 내가 업무를 시작한 날부터 며칠간을 매일 전화를 받다말고 눈물을 흘렸다.

물론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나도 잘 안다. 그때만 해도 주차단속을 당한 운전자가 과태료 부과에 대한 불만을 담당공무원에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육두문자로 장시간 화풀이 해 대는 것이 매일 반복되는 업무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주차단속 업무의 실무책임자는 바로 나인데 업무담당 공무원인 그 친구가 매일 곤혹을 치루니 나도 안타까운 마음에 내뱉은 말이 “사표 내시오”였다. 당시 그 후배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자신을 도와줘야 할 계장이 사표를 내라니? 아마도 그런 사람과 같이 근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날 퇴근시간이 되어 그 친구에게 퇴근 후 시간을 할애 받아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눴다. 그때 내가 그 친구에게 “공무원은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다” “그리고 즐겁게 웃으며 일하고 사는 것이 울면서 일하는 것보다 백배 낫다. 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 말해줬다.

그 시절엔 주차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주민의식도 낮았고, 주차방법 등에 대한 안내도 미흡했을 뿐만 아니라 인력에 의한 단속을 하다 보니 단속을 당한 주민도 오늘 재수가 없어 단속을 당했다는 생각이 팽배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 불만이 담당공무원에게 화풀이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프로는 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프로는 주민이 어떠한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휘둘리거나 내 감정에 이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공무원은 적어도 그 주민을 이해 설득하거나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주민의 언행에 자신이 휘둘리지 말아야 된다. 그렇게 일을 하면 눈물을 흘릴 일도 주민을 미워할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혹여 막무가내라면 내게로 전화를 돌리라고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후배는 울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제되지 않은 내 말에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어 내게도 항상 말이란 상대의 입장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래도 그 후배가 그때 내가 한 말이 가슴에 못이 되지 않고, 프로다운 공직생활을 해 왔기에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웃으며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얘기를 하다 보니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1월에 공무원을 시작하여 40여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백수 5년이니 아마도 공무원으로 재직했던 시기가 내 인생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 얘기하길 내가 걸어왔던 길이 역사요, 역사는 그 시절을 말한다고 했던가? 사회가 뭔지도 모르고 공무원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시작한 공무원 생활이었다.

2017년 2월 함양군 안의면 기백산 정상에서.

나의 공직생활을 그 시절에 얹어 생각해보니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발령을 받아 일했던 면사무소 근무 15년과 행정의 역할과 방향을 생각하며 일했던 군에서의 20여년, 그리고 보건소장과 면장으로 재직했던 5년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발령을 받아 면사무소에서 근무했던 시절은 식량 자급자족이라는 국가적 요구에 따라 농사행정에 총력을 기울였던 시기이다. 통일벼라고 하는 벼 다수확품종 확대재배와 퇴비증산, 벼 병충해방제에 모든 행정을 집중했었다.

지금 행정을 수행하는 공무원 후배들이나 젊은 청년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 시절에는 모든 공무원이 본인의 담당사무는 뒷전이었고 일 년 내내 밤 낮 없이 농사행정에 매달리다시피 했었으니까. 그 시절 자기주장이 강했던 나는 윗분들과 많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실익이 없는 가시적인 행정이나 주민을 협박하다시피 해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태, 공무원은 특별권력 관계에 있으므로 국가목표를 위해서는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논리 등. 그때 나는 그건 아니라며 반발했고 물리적인 다툼까지 불사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역시 인생 공부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문제를 풀어가는 해법도 다를 수 있기에 근시안적인 내 생각에 박혀있지 말고, 내가 먼저 원만한 소통을 시도했다면 내가 조금 더 빨리 성숙해지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본다.

2019년 5월 진천조각공원을 찾아.

이후 군에서 행정의 역할과 방향을 생각하며 수행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지만 그중에서도 문화예술회관, 박물관, 종합사회복지관 공모 및 설계가 생각난다. 수개월이 걸려 건물의 공모와 설계가 완성되고 문화재관리청에 건축 승인을 요청했다. 그런데 많은 예산이 투입된 건축승인 건이 부결되었다.

황급히 문화재관리청을 방문하여 상황을 파악해보니 상림이라는 천연기념물 가까이 건축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문화재지역 건축승인은 문화재위원 전원의 합의를 받아야 하는 것이어서 한 달간 20명의 위원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부탁했다. 그 중 한분이 결코 안 된다며 반대했고, 현장설명회에도 참석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인사대천명이라 했던가? 당일 아침 현장설명회에 5분 정도만 참석하겠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서울에서 함양까지 내려와 5분이라니 이는 말도 안 되는 애기지 않은가? 그날 그 위원은 오후 서울에서의 일정을 포기했고, 건축동의서에 서명하여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해결되었다.

이는 부서 동료 모두가 꼭 해내겠다는 마음으로 한마음이 되어 임한 결과였기에 기쁨이 배가 되었고 자신감이 충만했던 것 같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임한다면 일의 무게는 가볍고, 기쁨은 배가된다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 계기였다.

사무관 진급을 하고서는 보건소장과 면장으로 근무하면서 같이 근무하는 모든 동료가 기쁜 마음으로 출근하고, 즐겁게 일하고, 행복하게 퇴근하는 직장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2020년 8월 강릉 정동진에서 부부가 휴식을 만끽하고 있다.

나의 공직생활을 뒤돌아보며 그래도 이것만은 괜찮았다고 생각되는 게 한 가지 있다. 그건 내가 계장 보직을 받은 이후 동료들에게 “일을 왜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고 질책해본 적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잘 하려고 했을 것이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겨 결과가 좋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40여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인생 2막을 살아가고 있다. 남은 생은 어떻게 살아야 될까? 지금까지의 생에서 부족했던 것들을 조금씩 채워가고 싶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에게 많이 소홀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것이 정의이고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훗날 곰곰이 생각해보면 잘못된 것일 때도 많았다.

또 내 생각과 많이 달라 나를 괴롭혔던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고마운 분께 감사의 표현도 제대로 못한 일들도 많다. 어떤 이는 인생을 고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인생은 소풍이라고도 한다.

나는 인생 2막을 즐거운 소풍으로 만들어 가려 한다. 항상 나를 내려놓고 긍정의 자세로 살아간다면 나의 인생 소풍은 그래도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개똥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여기며 말이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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