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잎과 송순, 함양 쌀로 빚어
집안에서 내려온 선비의 술

역대 대통령·총리 휴가 맞아
솔송주 마시러 함양을 찾기도

은은하게 퍼지는 솔향은
개평마을 수더분한 한옥 닮아
선비의 기품 느껴볼 수 있어

솔송주는 옛 선비의 정신을 그대로 체험해 볼 수 있는 술이다. 함양 개평민속마을에 위치한 눌재고택. 눌재는 정천상 대표의 증조부로 제천 현감을 지낸 정재범 선생의 호다. <사진: 솔송주>

“고택 대청에 앉아 있으면 부드러운 바람이 어느새 불어와 살며시 감싸준다. 솔향 가득 품은 솔송주가 있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정도다.”

솔송주는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는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문헌공 정여창 선생의 하동 정씨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500년 전통의 가양주(家釀酒)다. 솔잎과 송순, 지리산 암반수, 찹쌀과 누룩으로 빚은 술로, 함양 송순주라고도 한다.

솔송주는 개평마을 인근에 위치한 양조장인 농업회사법인 ‘솔송주’에서 대한민국 식품명인 27호이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35호인 박흥선(68) 명인이 시어머니에게서 전수받은 비법으로 남편 정천상(75) 대표이사와 함께 만드는 술이다.

솔잎, 송순을 가리고 있는 박흥선 명인.

솔송주의 본래 명칭은 송순주로 하려했으나 1996년 주조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송순주라는 명칭이 전통술인 김제의 송순주(松筍酒)로 이미 등록되어 있어, 송순주를 발음하기 쉬운 ‘솔송주’로 이름을 등록했다. 오히려 친근해서 더 맘에 와 닿는다.

솔송주는 알코올 도수 13도의 맑은 약주다. 은은한 솔향이 먼저 반기고 마신 뒤엔 코끝에 올라오는 여운이 기품 있다. 목 넘김이 좋고 솔잎 특유의 떫은 맛이 없는 점이 특징이다. 도수가 높지 않으며 단맛, 쓴맛, 부드러운 맛이 좋은 깔끔하고 향이 좋은 술이기도 하다. 담백한 맛은 개평마을의 수더분한 한옥을 닮았다.

또한 솔송주를 증류한 40도짜리 ‘담솔’은 2년간 저온 숙성시켜 입안에서 막 굴려도 찌르는 느낌 하나 없이 부드럽고 순하다. 독한 줄 모르고 계속 들이키게 만드는 전형적인 ‘앉은뱅이술’이다. 담술 한 잔이 입안에 머무르면 은은히 퍼지는 소나무 순의 향과 솔잎의 신선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소줏고리에서 증류주를 내리고 있는 모습.

솔송주는 매년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거둬들인 솔잎 새순을 살짝 쪄서 사용해 솔잎의 청량한 향을 더욱 살렸다. 만드는 법은 보통의 약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멥쌀로 고두밥을 쪄서 누룩과 섞어 밑술을 만들고, 사흘 뒤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은 솔잎과 송순을 살짝 쪄서 고두밥과 함께 밑술에 섞는 덧술 작업을 한다. 솔잎과 순을 찌는 건 떫은맛을 덜어내기 위해서다.

본래 전통 방식은 밑술을 찹쌀죽으로 만드는데, 대량 생산을 시작하며 깔끔한 맛과 안정적인 재료 수급을 위해 멥쌀 고두밥으로 바꿨다. 쌀은 함양에서 난 햅쌀만 쓴다. 덧술한 뒤엔 상온에서 사흘, 저온에서 3주가량 발효를 거친다.

그런데 솔잎과 송순을 따는 시기가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솔잎은 이른 봄, 송순은 늦봄에 채취한다. 솔잎은 이른 봄에 향이 좋고, 송순은 늦봄에 생명력이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자기에 담긴 솔송주.

특히 솔송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공식 만찬주를 시작으로 2008년 람사르 총회 공식 건배주에 지정되면서 인기를 얻었다. 퇴임 후 노무현 대통령은 개평마을의 솔송주를 방문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농업진흥청 50주년 행사에서 농진청이 고문헌을 보고 복원한 녹파주를 박흥선 명인이 기술이전 생산했고, 건배사를 하며 만났다.

문재인 대통령도 대선 후보시절 솔송주를 방문해 “신선의 술입니다”라고 방명록을 남겼다. 솔송주는 2019년 청와대 설 선물로 선정돼 국가유공자 등 1만여명에게 전달됐다. 2018년에는 이낙연 총리가 여름휴가 때 솔송주문화관을 찾기도 했다. 솔송주는 대한민국주류 대상, 담솔은 대한민국 우리술품평회 대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우리술품평회 대상을 차지한 ‘담솔’

지리산 함양을 찾아온다면 솔송주가 탄생한 아름다운 한옥 고택에서 그윽한 솔송주의 향과 함께 운치 있는 한옥스테이도 즐길 수 있다. 솔송주문화관에서는 솔송주와 담술을 시음할 수 있다. 미리 예약하면 30분가량 소요되는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소줏고리로 소주 증류를 해볼 수 있고, 전통주 칵테일을 만들 수도 있다. 칵테일은 담솔에 얼음과 탄산수, 민트, 레몬, 블루 큐라소 등을 넣어 만든다.

솔송주는 옛 선비의 정신을 그대로 체험해 볼 수 있는 술이다. 사시사철 푸르러 선비의 충절을 상징하던 소나무의 정신을 오롯이 표현한 술이기 때문이다.

지곡 개평문화마을에 위치한 솔송주문화관 앞.

마음의 긴장과 피로를 풀었다면 이제는 개평한옥마을을 둘러보자. 이곳은 오래된 한옥 60여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개평한옥마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일두 정여창이 살았던 터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 일두 고택이다. 대지 4770㎡(1445평), 안채와 사랑채를 포함하여 12동의 건물로 18세기에 개축된 사랑채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건물이 16~17세기에 건축됐다. 1984년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으며, 넓은 부지에 사랑채, 안사랑채, 안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을 고루 갖추고 있는 집으로 남부를 대표하는 대저택이다.

함양의 개평마을이 아름다운 것은 대부분의 한옥이 실제 살림집이라 시골 생활의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이다. 골목에서 만나는 흙담 사이로 뿌리내린 능소화, 수줍게 담 너머로 가지를 넘긴 석류마을 등은 한옥마을의 운치를 한껏 더한다. 조선시대 한옥 본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역사와 정신, 문화까지 만날 수 있다.

지리산 자락의 함양은 옛 선비처럼 더위를 식히기 제격인 곳이다.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함양은 안동과 함께 많은 성리학 대가를 배출한 선비의 고장이기도 하다. 올 여름, 함양에서 선비의 기품을 느껴보자.

이은정 기자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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