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청한 재경함양향우회 향우.

우리 송 서방이 “아버님 컴퓨터에 저희 가족 모임방을 깔아 놓았습니다”며 은근히 방문을 원하는 눈치였다. 컴퓨터를 켜면 바탕화면에 ‘복 있는 가정’ 모임방이 보이긴 했다. ‘요란한 톡 방이 아닌 비공개 밴드형 모임방이라고 하니 언제 들어가 봐야지…’ 하며 미루다가 컴퓨터 본체를 바꿔야하는 사달이 났다.

내 컴퓨터에서 사위가 저장해 준 모임방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지내던 어느 해 설날 연휴였다. 친정에서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던 둘째 딸의 목소리가 크고 힘이 잔뜩 들어있다. 아이들 등쌀에 못 이겨 아침 일찍 일어난 게 억울했는지, 전날 밤에 고스톱을 치면서 신랑 송 서방에게 내내 술을 강요한 이모가 못마땅했는지 모르겠다. 그때까지 나는 거실로 나가지 않고 내 방에서 엉거주춤 있던 참이었다.

“이모는 표 나게 언니 애들만 좋아하고, 오랜만에 보는 우리 애들에겐 그저 그렇데. 엄마도 똑 같고…” 둘째 딸은 급기야 울기까지 한다. 장본인이 된 이모는 그 시간, 잠자리에서 일어날 리가 없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또 다른 장본인 아내는 뭐라 뭐라 하는데 나에겐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궁색한 변명이지 싶다.

둘째 딸은 부전공인 아동복지학을 살려 어린이집 보육교사였다. 결혼 후 경단녀가 돼 신랑 혼자 외벌이하는 탓에 검소하면서 야무지고 단단한 살림꾼이 되었다. ‘친정이 그동안 자기들 가족에게 얼마나 무심했으면 저렇게 폭발할까’ 나는 그런 원망을 하는 둘째 딸에게 그저 미안할 뿐 섭섭하지 않았다. 둘째 딸 입장에서는 언니 네에 치여 친정으로부터 뒷전 취급을 받는 게 어제 오늘도 아니지만 그동안 진득이 참아준 게 어디인가.

한 살 위 언니는 두 아들이 또래에 비해 다르고, 처진다. 게다가 시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매사 친정의 도움이 절실하다. 오죽하면 친정 가까이로 이사까지 했을까. 어쩔 수 없이 친정 붙박이가 된 언니다. 몇 해 전부터 엄마와 이모는 언니 집에 입주하여 두 손자를 돌보며 살림을 도맡고 있다. 일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언니 부부가 퇴근할 때까지 매 순간이 전쟁이라 심신이 지칠 만도 한데 두 여사님의 손자 사랑은 화수분이다.

반면에 우리 부부가 둘째 딸 집을 가본 지가 언제인가. 다섯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둘째 딸은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서울에 있는 시가(아이들 친가) 동네에 있는 교회를 매주 다녔다. 주말마다 두 손주가 친가에서 공주와 왕자 대우를 받는 게 눈에 선하다.

둘째 딸은 시가에서 김포 집으로 돌아가면서 친정인 우리 집을 들른다. 아이들은 외가에 와도 이웃에 사는 4촌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 우리와 김포 손주들이 자주 부딪쳐야 외가에 온 남매가 깔깔대며 시끄러울 텐데 이따금 만나서 그런지 조용한 편이다. 아이들에게 살며시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김포에 가자!”고 놀이터를 옮겨가며 구슬린다. 조손간 속성으로 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별 효과가 없다.

우리 송 서방, 최근에 내 휴대전화기가 바뀐 것을 알고 잠시 구경하더니 ‘가족 모임방’을 이번에는 내 전화기에 저장하는 눈치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내 컴퓨터에 ‘가족 모임방’을 깔아준 게 언제인데 아직도 초대에 응하지 않는, 방문하지 않는 ‘꼰대 장인’, 벽창호 친정 아빠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위와 딸, 참 속이 좋다.

며칠 후 못 듣던 신호음에 전화기를 여니 딸 가족 모임방 ‘복 있는 가정’이다. 올해 김포 손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사진이 여럿 있다. 미리 책가방을 선물했다던 친가 할머니가 입학식 날에도 오셨다.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 상기된 아이들 엄마, 흐뭇한 할머니 모습을 어디서 이렇게 보겠는가.

아이 둘을 주인공으로 올리는 사진과 짧은 글. 손주들은 친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배드민턴을 치고, 막 익힌 두발자전거로 씽씽 달린다. 태권도 승급 심사, 할머니 칠순 파티, 성경 암송대회, 이빨 빠진 못난이 날, 줄넘기 2단 뛰기, 온라인 참관 수업, 받아쓰기, 주문진 수산시장, 강릉 백사장 등 그때그때 봤어야 할 순간순간에 때 지난 탄성과 환호를 삼킨다. 장면 장면을 모아 책으로 출간해도 멋지겠다.

늦었지만 나는 아이들 외가 대표로 모임방에 들어가 짧은 댓글로 동참하며 공유한다. 딸 가족 모임방이 서로에게(멤버 8인) 다리를 놓아주니 둘째 딸 부부와 손주들을 뜸하게 만나도 훨씬 보드랍다. 온라인이지만 참여와 공유는 소통의 지름길이다. 82년생 우리 딸을 울리지 않아야겠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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