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애 산청 송강마을 거주, ‘까르페디엠’ 회원.

“밤사이 전국적으로 많은 양의 눈이 올 예정입니다. 시설물 관리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TV에서 나오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뒷집에 사는 순영이랑 내일 아침 일찍 만나기로 했다. 우리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진주성 촉석루에 가서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우리 둘의 발자국을 제일 먼저 남기는 거였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떠 밖을 내다보았다. 일기예보대로 세상이 온통 하얀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우린 소풍을 가는 아이처럼 들떠서 촉석루로 향했다. 세상이 온통 새하얗고 눈부셨다. 눈 위를 한 발 한 발 지르밟고 걸어가면 ‘뽀득뽀득’ 소리가 귀를 간질거리게 했다. 그 소리에 친구와 나는 깔깔거리며 열심히 걸어갔다.

촉석루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진주성에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보니 성벽 위, 처마 끝, 돌난간이 새하얗게 옷을 갈아입어 근엄하던 본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우리들은 넓게 펼쳐진 눈밭을 사정없이 뜀박질하고 언덕배기에서는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눈이 녹기 전에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손으로 눈을 뭉쳐 바닥에 데구루루 굴려 커다란 눈사람 만들었다. 소나무가지에 앉은 솜털 같은 눈송이를 향해 눈뭉치를 던져 잠자던 나무를 깨워보기도 했다.

한참을 놀고 나니 허기지고 목도 말랐다. 주변을 둘러보니 보이는 건 드넓은 눈밭뿐이었다. 우리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눈밭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눈을 먹었다. 설탕 한 스푼의 달콤함이 아쉬웠지만 나름 근사한 아이스크림이었다. 얼굴과 옷에 묻은 눈이 녹으면서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아쉬웠지만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눈밭에 남긴 우리들의 수많은 발자국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며칠 동안 친구와 나는 열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 엄마는 아파서 누워 있는 나를 보며 ‘네가 강아지여! 눈만 보면 천방지축으로 뛰어 댕기게?’ 하며 끊임없는 잔소리를 했다. 나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눈이 또 왔으면…,’ 하고 기도했다.

어느새 반백이 넘은 내 머리에도 눈꽃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나는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던 철없는 아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의 일들이 자꾸 떠오른다. 현실적인 세상살이에 부딪혀서 지칠 때면 나를 돌아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시골에 살면서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접하면 냉장고에 들어있는 식재료부터 살핀다. 적설량에 따라 달라지지만 운이 좋으면 바람이 지나가면서 눈을 쓸어주기도 하고 부지런한 햇볕이 닿아 녹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운이 나쁘면 눈 쌓인 자리에 매서운 강풍이 불어 도로는 꽁꽁 얼어버린다. 그야말로 시간이 해결해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복불복이었다.

밤사이 눈이 내렸다. 눈은 신비함과 그리움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이른 아침 마당에 나가 쌓인 눈을 밟아본다. ‘뽀득 뽀드득’ 소리에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어느새 친구랑 촉석루 눈밭을 구르던 천진한 어린아이가 되어 눈 위를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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