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을순 지리산이 좋아 10년 전 귀촌, 예치골에서 소소한 행복을 가꾸는 중.

나는 용기를 내어 취미로 떠나는 여행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내 취미는 걷기, 등산, 글쓰기, 바느질하기 등등 다양하다. 그중에 가슴 깊숙이 숨겨 두었던 바느질 여행을 하게 된 사연을 써보려 한다.

나는 버스도 오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서 태어났다. 벽지 학교에서 나름 똑소리 나게 공부를 잘해서 6년 내내 우등상을 타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동네의 중학교가 아닌 시내에 있는 사립 중학교에 가게 되었다.

중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동이 트기 전부터 걸어 나와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 걸려서 학교로 가는 길은 꿈을 심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여름, 아버지는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다. 투병 중에도 두 살 위 오빠를 대학에 보내려고 인천에 월세방 얻어 고등학교에 다니게 했다. 그럴수록 나의 꿈은 시들어 갔다.

고등학교 원서를 쓰고 싶다고 하니 지금 이 상황에 무슨 고등학교냐며 단숨에 꿈을 깨버린 엄마, 떼조차 쓸 수 없었던 상황에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학교 이사장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낮에는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할 수 있도록 야간학교를 만들었다. 나는 공부를 포기할 수 없어 야간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재봉틀 발판을 밟으며 와이셔츠를 만들었다. 밤에는 학교에 가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공부를 했다. 힘든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자퇴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일에 쫓겨 지문은 닳아 없어지고 잠이 부족해 졸다가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반창고가 떨어질 날이 없었던 3년 동안 다짐했다. 학교만 졸업해 봐라! 다시는 재봉틀 발판을 밟지 않을 거다.

그러나 3학년이 되던 해 여름, 긴 투병 끝에 아버지는 노모와 젊은 아내 그리고 7남매를 두고 떠났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군대에 간 오빠, 학교에 다니는 어린동생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장 아닌 가장이 되었다. 엄마 손에 이끌려 동대문에 있는 평화시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꿈이 사라진 나는 재봉틀 소리가 지겨웠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갈망했다. 벗어나고 싶어서, 그즈음에 남자친구가 제대를 했다. 도망치듯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드디어 재봉틀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잊었다.

34년 후, 나는 작업실에 앉아 재봉틀 발판을 가볍게 밟고 있다. 내 옷을 만들고 남편의 옷을 만들며 행복한 바느질 여행을 하는 중이다.

생리대가 없어서 옷으로 막고 있다는 이웃 나라의 어린 소녀들, 그 소녀들을 위해 소창으로 생리대를 만든다. 생리대와 속옷을 담을 주머니 만드는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나는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 주머니와 함께 하는 바느질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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