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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지리산
이종영 산청군 농촌관광연구회원.

내 고향은 지리산 동쪽 덕천강변 송정마을이다.

서부경남에서 덕산 유덕골이라면 토끼 발맞추는 깊은 산골의 대명사로 통한다. 진주에서는 ‘덕산유덕골 촌놈’ 또는 ‘삼장새내’서 왔다면 안데스산맥 어느 골짜기의 원주민쯤으로 본다.

여순 반란 때 지리산에 숨어든 반란군이 양식을 구하러 대원사 초입 소막골로 내려와 보초 선 주민을 총살했다. 그때 평촌마을, 면상마을, 송정마을 청년 보초들이 모두 죽었다. 여순 반란 사건의 불똥이 지리산 넘어 내 고향 삼장까지 큰 피해를 입혔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3개월 만에 산청까지 내려온 공산군은 우리 마을에 있는 면사무소, 지서, 학교를 불 지르고 김일성장군 노래를 가르쳤다. 맥아더 장군과 우리해병대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퇴로가 끊긴 공산군과 지방 빨갱이들은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몰려들었다.

공비를 토벌하러온 수도사단 김정원 부대와 지방 특공대가 덕산, 대하, 석남고지에 진을 치고 낮이면 공비를 토벌하러 산으로 갔다. 밤이면 매일 공비들이 나타나 쌀과 반찬, 먹거리를 가져갔다. 마을에서 빼앗은 식량을 운반하려고 남자를 짐꾼으로 잡아갔다. 이웃 남자들과 아버지도 짐을 지고 지리산 일대를 석 달 동안 끌려 다녔다. 그믐밤 이동 때 산골짜기로 굴러 구사일생으로 도망쳐왔다. 이곳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이면 인민공화국이 되었다.

설날아침, 총소리와 대포소리를 들으며 제사를 급히 지내고 밥을 먹었다. 국군들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공비소굴이라며 잔당을 잡는다고 마당 빗자루에 석유를 묻혀 초가지붕을 불태웠다. 이불과 쌀 몇 됫박 소 한 마리 몰고 단성, 진주, 집현, 친척집에 얹혀살며 목숨을 연명했다.

휴전이 되고 3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움막집을 짓고 살았다. 산 아래 천막치고 가마니 깔고 앉아 1학년에 다시 입학하여 공부를 했다. 1963년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생포되고 이홍이가 사살될 때까지 13년 동안 내 고향은 전쟁터였다.

소를 잡아먹는 강가에 빨갱이 얼굴을 확인하러 동네 아이들과 가보았는데 우리와 똑같았다. 귀한 소고기 몇 점 얻어먹고 신이 나서 자랑하다 아버지께 혼쭐이 났다. 학생들은 공비 잔당들의 이름과 특징을 외우지 못하면 학교도 못 갔다. 동네 사람들은 덕산 장에 갈 적에 지서 순경이 길을 막고 잔당들 이름을 외워보라고 했다.

불타다 남은 면사무소 호적초본 미농지로 제기를 만들어 차고 창틀 밑 롤러로 썰매를 만들어 탔다. 그 당시는 전쟁놀이를 많이 했다. 막대기로 칼싸움, 돌로 비석치기, 연줄싸움, 땅따먹기, 돌멩이싸움이 놀이였다. 강가에 가면 소라, 고동, 물고기가 많고 강둑에는 삐삐가 지천이었다. 산에는 송곳, 찔레순이 있고, 가을이면 보리똥, 머루, 다래, 고염, 감이 별미고 간식이었다. 감자서리, 밀서리, 소먹이고 멱 감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입가에 검정 숯칠이 된 친구들 얼굴이 아른거린다.

부모님 산소에 성묘 왔다가 옛집을 찾아드니 풀이 무성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집을 구입해서 퇴임 후 살고 있다. 50년을 직장 따라 이곳저곳 살다가 수구초심으로 귀향하여 16년째 감농사를 짓고 있다. 일곱 살 아이의 고향 생각은 온통 전쟁뿐이다. 그래도 그 아이는 감자밭 복숭아밭이 그리워 고향에 살고 있다.

울 장미가 빨갛게 피어있는 고향의 강 언덕에 근심걱정을 내려놓았다. 강물한테 산에게 바람에게 감나무에게 너희는 다정한 내 친구라고 말한다.

지금의 내 고향 지리산은 참으로 조용하다. 그리고 편안하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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