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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세 번째!
백을순 산청 시천면 거주.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생각하며 하고 싶은 일들을 미리 포기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긴 나이뿐일까? 여자라서, 아이가 있어서, 시골에 살아서, 본질과는 무관한 상황들이 끊임없이 나를 멈춰 서게 하고 돌아서게 한다. 나이와 상황보다는 안으로 숨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는지, 스스로 쌓은 담장 안에 주저앉아 있으면 최소한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지거나 어딘가에 부딪히지는 않을 테니까. 라문숙 작가의 ‘내게도 가끔은 토끼가 와주었으면’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대목이다.

나도 늘 그래왔다. 결혼 전에는 집안 형편과 동생들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혼해서는 아내, 며느리, 주부, 엄마라서 등등의 갖은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내 꿈을 포기하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스스로 성을 쌓고 그 안에 숨어버린 것이다. 그 성을 허물어 버리면 내가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아서, 그리고 상처만 남을 것 같아서, 그 상처를 견디고 치유하고 단단해질 자신이 없어서였다.

살면서 작가라는 꿈을 꾸어 본 적은 없었다. 꿈 많던 소녀시절엔 책 읽기를 좋아했고 결혼을 하고도 일기를 꾸준히 써 왔다. 그런 시간이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내 일기를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안에 꽁꽁 숨겨두었던 비밀공간을 들켜버린 것을 알고 무너져버렸다. 거기에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내가 있었다. 그런데 몽땅 들켜버렸다. 그 많은 일기장을 태워버렸고, 그 후로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목마름은 가시지 않았다. 가슴이 버석버석 타들어 갈 즈음 컴퓨터가 생기고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문명을 알게 되면서 다시 나만의 비밀공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글쓰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지리산자락으로 귀촌하여 자연과 벗하며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글쓰기 강좌를 알게 되었다. 용기를 내어 강좌를 신청했고, 조금씩 내 안에 가두었던 속내를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꺼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깊이 감추고 묻어두었던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내가 쓴 글을 읽었다.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아픈 추억과 속상했던 일들, 기뻤던 날들도 하나하나 끄집어내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내 글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나를 응원해주었다.

어제는 내 글이 실린 세 번째 책이 나왔다. 내 이름을 걸고 나온 책은 아니지만, 그냥 내 글이 책으로 만들어져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책자에 인쇄된 내 글을 보면서 부듯함이 밀려들었다.

오늘 아침 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겁내지 말자. 조금씩 용기를 내보자. 나를 부수고 깨트려 보자. 상처는 언젠가 아문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상처가 두렵다. 언제쯤 그 상처와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까. 그때까지 쓰고 또 쓰면서 조금씩 단단해져야겠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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