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 소설가.

봄볕에 그을리면 님도 못 알아본다고 요즘 산청군 시천면 중태마을 어르신들 얼굴이 죄다 새까맣다. 매일같이 뵙던 분인데도 ‘어? 저분이 누구시지?’하며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울 만큼 검게 그을린 걸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요 며칠 사나흘 간격으로 봄비가 적당하게 내려주자 경운기 소리가 종일 마을에 울린다. 부지런한 꿀벌할아버지는 논을 갈고 물을 채우며 못자리 준비로 바쁘시다. 잠시 쉬는 틈을 봐서 할머니들은 나물을 꺾으러 산으로 나가신다. 고사리, 취나물, 머윗잎이 지천이다. 그중에서도 중태마을에 유독 눈에 띄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바로 개미할머니다. 개미처럼 늘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셔서 그렇게 부른다. 어르신들 존함을 함부로 부를 수 없고 그렇다고 택호를 부르기도 뭣해서 별칭을 지어드렸다. 

개미할머니는 여든 중반으로 몸집이 개미처럼 작고 야위셨다. 그런데도 잠시라도 쉴 참이 없이 움직이신다. 중태 안내소에서 지리산둘레길을 따라 유점마을 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 걷다 보면 개미할머니네 밭으로 가는 비탈길이 보인다. 개미할머니는 매일 그 밭에 올라가서 자루에 가득 뭔가를 담아 오신다.

자루 안에는 무, 감자, 고추, 호박, 오이와 각종 나물 등 온갖 것들이 사철 종류만 바꿔가며 들어 있다. 얼마나 힘이 센지 어느 땐 할머니 몸보다 더 커다랗게 자루를 만들어서 지고 내려오신다. 자루가 무거우면 몇 번이고 쉬다가 내려오는데 이른 아침에 올라갔다가 해거름에 내려오실 때도 있다. ‘좀 쉬어가며 하세요’ 하고 말씀드리면 ‘내사 마 괜찮소!’ 이렇게 대답하신다. 

개미할머니는 중태안내소의 단골이기도 하다. 사람이 그리워선지 자주 안내소에 들러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가신다.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 자제분들 얘기, 마을 얘기를 듣다보면 할머니 사연이 곧 이 마을의 역사였다. 간혹 안타깝고 가슴 아픈 사연도 들려주신다. 사람살이가 다 그러하듯 기쁘고 행복했던 일보다 가슴 아픈 기억이 오래 남는가 보다. 안내소에 오실 때마다 따뜻한 차를 드렸더니 과자나 과일, 어느 땐 감자, 옥수수를 삶아서 넣어주셨다.

근래 개미할머니 건강이 안 좋으셨다. 마당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병원 신세도 져야 했다. 그래선지 한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고 며칠 기척이 없었다. 혹시나 변고가 생긴 건 아닌가 가슴이 덜컥했다.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개미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이쪽으로 걸어오셨다. 얼마나 반갑던지! 몸이 많이 아파서 부산 아들집에서 지내다가 지금 오는 길이라고 했다.

봄비를 맞아 앙상하던 감나무가 연둣빛 고운 싹을 내밀기 시작했다. 봄꽃이 지니 새순이 돋고 마을은 지금 초록으로 단장을 하는 중이다. 마을에 생기가 돌고 눈이 환해진다. 이런 소생의 기운이 개미할머니에게도 스며들었나 보다. 오늘도 개미할머니는 자루 가득 뭔가를 담아지고 안내소 앞을 지나가신다. 언제 아팠냐 싶게 발걸음에 힘이 들어 있다. 개미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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