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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유년이었다
윤설아 산청 방목리, 전직 초등교사.

내 삶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떠올려본다. 태어나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했던 시간으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결혼과 동시에 군대에 가셨다. 8남매 장남이셨으니 빨리 손자를 보고 싶은 할머니의 바람이 컸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 법,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엄마에 대한 구박은 나날이 더욱 심해졌다. 2년이 흐른 후 임신을 하고 태어난 아이가 나였다. 할머니가 바라던 손자가 아니었지만 첫 손녀였던 내게 온 집안의 사랑이 쏟아졌다. 나는 할머니, 고모, 삼촌들 손에서 자랐고 엄마는 그저 젖 먹이는 유모 역할만 주어졌다.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란 나는 학교생활도 잘하고 성적도 꽤 좋았다. 무슨 일이라도 적극적이라 교내외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상을 받아와 가족들의 기쁨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 가장 기억나는 대회는 학교대표로 나갔던 웅변대회와 고전읽기 대회다.

고사리손을 오른쪽 왼쪽으로 들어올리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있는 힘껏 외쳤다. 고성읍에서 열리는 웅변대회에 참가하기 전날에 소사아저씨께서 집으로 오셔서 목소리가 잘 나오려면 날달걀을 먹어야 한다며 억지로 먹이려 했지만 결국 토하고 말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택에 사셨던 교장선생님께서 보내셨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

고전읽기 대회도 교장선생님께서 직접 지도하셨다. 여름방학이었는데도 학교로 불려가서 나무그늘에 앉아 책을 읽었다. 학교 안 사택에 사셨던 교장선생님께서 가끔씩 나와 감독을 하셨고 살짝살짝 눈치껏 즐겁게 놀았다. 지금 이렇게 글쓰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것이 그때의 영향도 없지 않으리라 생각되어 고맙고 고맙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에 들어갈 때 입학시험이 있었다. 시골 작은 학교였지만 나는 당당히 1등으로 입학하였고 학교생활은 순조롭고 원하는 대로였다. 3년의 중학생활을 마감하는 고등학교 입시가 다가왔고 갈등이 시작되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 진주였으니 유학을 해야 했고 학교도 결정해야 했다. 밑으로 동생이 셋이나 있는데 농사지어 자녀들 공부시키기가 두려웠던 부모님은 S여상을 졸업하면 바로 취직을 할 수 있다며 권하셨다.

그때 담임선생님께서 진주여고에 갈 것을 추천하셨고, 교육열이 있으셨던 부모님께서 받아들여서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합격자 발표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라디오를 켜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927번’이 불리어졌다. 손뼉을 치고 만세를 불렸다. 바로 위 학년에 합격한 선배가 한 명도 없었는데 내가 일을 낸 것이었다.

나의 찬란한 시간은 중학교까지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혼자 자취를 했다. 곤로에 밥을 지어 도시락을 싸고 연탄불이 꺼질까 전전긍긍하는 힘겨운 시간이었다. 시내 친구들은 학원도 다니고 과외도 받는데 그런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 성적은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존감은 떨어졌다. 그 때문인지 내 기억 속 고등학교 이후 시간이 아름답게 추억되지 않는다.

나의 유년시절은 늘 찬란함으로 빛난다. 사랑받았고 자신감으로 뭐든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파릇파릇 싹을 틔워 성장하는 초록의 시간이었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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