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 전 주교황청대사관 대사.

서부경남 주민들 정체성은
경상도에 대한 애향심보다
거창·함양·산청사건이 남긴
공포가 뿌리 깊게 남아있어
김길동 이장 같은 의인들의
자존심 살려낼 시대 만들자

“선상님, 어디 가요?” “문정 갑니다.” “문정사람 아닌데, 말소리가?” “귀촌해서 삽니다.” “아래숯꾸지 강아무개, 도정 이아무개 아쇼?” “압니다. 두 분 다 돌아가셨는데요.” “암, 죽었지. 내 목현 동창들이지.” “… …” “선상님, 나 사람 아니요.” “네?” “우리 딸내미가 절대 이런 말 하지 말랬는데… 나 말이요, 나 사람 아니요. 나 대한민국 육군대위요.” 약주로 거나한 저 육군대위가 사람 아니면 뭘까? “나 사람 아니요. 죄다 쏴 죽였소, 내 손으로! 보도연맹이라고 끌어오면 내 손으로 쏴죽여뿌렀소. 나 사람 아니요.” “… …” 그 새 군내버스는 대포마을 입구에 섰고, 90세가 훨씬 넘어 보이는 노인은 천천히 버스를 내려 휘적휘적 마을길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 인생에서 돛 감고 닻 내릴 나이면 저승의 문턱을 넘어서자 만나야 할 사람들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필자와 통성명도 안 했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은 저 노인은 ‘보도연맹’이라는 딱지가 붙인 채 묶여와 자기 총구 앞에서 목숨을 앗기던 장정들의 눈빛이 70여년이 가도 지워지지 않다 보니 군내버스에서 처음 보는 뜨내기한테라도 속맘을 털어놓았던가보다. ‘서부경남’ 노인들의 뇌리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아픈 기억이리라.

거창군 신원면의 ‘거창사건추모공원’이나 산청군 금서면에 서 있는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의 2000여명 희생자 틈에 이름이라도 새겨져 있는 500여명 ‘어린이들’ 묘석을 생각한다. 1951년 설날 그 이튿날. 부엌에서 끌려나와 대한민국 국군의 총부리 앞에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던 어미들의 젖가슴에 안긴 어린이들의 머리에 총을 쏘아 죽이고서 ‘공비를 토벌한 전공’(한 살부터 다섯 살짜리 공비라니)으로 훈장을 받은 국군 제11사단(최덕신 장군), 제9연대(오익경 소령), 제3대대(한동석 대위) 병사들.

해방 후 유엔의 결의를 무시한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제주(4·3)와 호남(여순) 주민들이 저항하자 “남녀 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여 반역적 사상이 만연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서를 내린 초대 대통령 이승만. 지리산에서 작전하는 국군에 “적의 손 안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는 명령서를 내린 국방부장관 신성모. 그들의 죄상이 반세기 훨씬 넘는 세월에도 지리산 발치에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으로 골골이 선명하다.

거창양민학살사건 희생자 유족들이 신원면 박산합동묘역에서 합동 제례를 지내고 있다. 박산합동묘역은 거창사건희생자 719명 중 517명의 희생자가 묻힌 곳이다. 당시 학살 관계자들은 거창사건을 덮기 위해 추모 비석을 훼손하기까지 했다. 훼손된 비석은 쓰러진 상태 그대로 뉘어져 있다. 거창사건의 완전한 해결 전까지는 추모 비석을 꼿꼿이 세울 수 없다는 유족들의 뜻에 따른 것이다. <사진: 거창군>

“우리가 남이가?”는 25년 전 대선 때에 위력을 발휘한 영남인들의 향토애였다. “박근혜가 어때서?”는 그의 부친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담아 영남에서는 2017년 탄핵정국에서도 선거판을 휩쓸었다. 김대중씨의 5년을 빼놓으면, 적어도 5·16 이후 55년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등 영남인들이 대한민국을 통치한 세월이었다. 그리고 지난 2012년에도 올해도 출신 도시는 달랐지만 경상인들끼리 겨루는 신바람 나는 선거판에서 경기 충청 호남인들은 들러리였다.

국민은 문재인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경남 전체에서는 두 후보 간에 0.5% 차이밖에 없었지만 ‘서부경남’에서는 함양군민 49.34%, 산청군민 51.63%, 거창군민 48.78%가 거의 두 배로 홍준표 후보를 지지하였다. 경상도든 충청도든 전라도든 자기 지역 출신을 대통령으로 뽑고 싶은 것은 타고난 애향심이겠지만, 이번 대선결과를 놓고 본다면, 외지인들의 눈에, 적어도 ‘서부경남’ 주민들의 정체성은 ‘경상도’에 대한 애향심보다 ‘거창·산청·함양사건’이 남긴 공포에 뿌리가 있었던 것 같다. 군중심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한번 심어주면, 더구나 학살자들과 피학살자들이 격리되지 않고 여전히 한데 섞여 살면, 그 불안한 집단은 완장차고 목청 큰 사람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는 사례들을 연구해냈다.

대선 운동기간 내내 같은 경상남도이면서 창녕사람 홍 후보가 부산사람 문 후보를 공격하는 유일무이한 빌미는 ‘빨갱이’였다. 같은 경남 사람 홍준표가 같은 경남 사람을 문재인을 ‘빨갱이’라고 욕하자, 아아, 그 욕쟁이에게 두 배의 표를 찍어줄 만큼 서부경남 인심에 뿌리박은 공포가 깊다.

서울 삼각산 발치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필자가 함양 문정리에 주민등록을 옮기고 정착한지 10년이다. 마을 이름도 정겨운 ‘아래숯꾸지’의 초입에는 마천 오석으로 세워진 광산김공길동지송덕비(光山金公吉童之頌德碑)가 서 있다. 비문에 새겨진 바로는, 1951년 2월 9일 ‘거창사건’을 일으킨 군인들이 하루 먼저 문정리에 들이닥쳤다. 마을주민 200여명을 논에 몰아놓고 총살하려던 찰라 마을 이장 김길동씨가 웃통을 벗고 나서서 마을주민 전부의 목숨을 구한 공적을 기리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 사람들 빨갱이 아니요. 산사람들이 총구를 들이대고 짐을 져라 하면 지고 가야 해요. 이장인 나를 죽이더라도 마을사람들은 살려주이소.” 이장의 간곡한 호소에 군인들이 총 한 방 안 쏘고 문정리에서 철수했단다. 서주든 방곡이든 이장의 손가락질 하나로 온 집안이 총살당하던 장면과 사뭇 달랐단다.

그 이장의 공적을 기리는 추모비가 선 날짜가 사건 발생 후 무려 50년이 지난 2000년 5월이기는 했지만 ‘서부경남’도 지금쯤은 65년전 국군 제11사단의 총부리 앞에서 떨다 살아남은 ‘생존자의 정체성’을 떨칠 때가 아닌가. 목숨 걸고 동리 사람들을 살려낸 김길동 이장 같은 의인(義人)의 정체성을 살릴 시기가 아닌가.

정치선동가들의 ‘빨갱이 장사’에 ‘그만 하이소!’라며 영남인의 자존심을 살려낼 시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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