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지로 이름 날렸던 ‘화림동’
물이 좋지 않다는 소문나면서
피서인파 몰린 여름도 한산해
이제는 눈요기 산수공원 전락

우리나라 정자문화의 보고이며
영남에서 제일 경치 좋았던 곳
화림동 계곡 살리는 일이야말로
역사적 문화유산 남겨 주는 것

화림동 계곡 앞 농월정 앞에는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넓은 화강석 반석 위로 흐르는 게 특징이다. <사진: 함양군>

[글= 이철우 본지 회장] “여름철에 화림동 계곡을 가보셨습니까? 맑고 아름답다고 그토록 찬양해 마지않는 계곡물에 발을 담가 보았습니까? 물가의 그늘에 돗자리를 깔거나 텐트를 치고 휴식을 취하는 휴가객이나 피서를 즐기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농월정,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을 돌아봤지만 어디에도 피서를 즐기는 사람을 많지 않았다고 상인들과 관광객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여름에 화림동 계곡을 찾는 사람이 확 줄었다. 탁족하는 어른이나 물놀이하는 어린이가 없다. 텐트치고 야영하는 캠핑 족이 없다. 34~35도를 기록하는 더운 날씨에 산과 계곡에는 피서인파가 몰린다는 뉴스가 나오는데 화림동 계곡은 한산하였다. 풍광이 좋은 화림계곡을 찾았다가 물이 좋지 않다며, 그냥 돌아가는 피서객이 많다. 물이 깨끗하지 않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화림계곡은 눈요기 산수공원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는 화림동 계곡의 풍광을 찬양하지만, 속살을 보면 울고 싶어진다. 금천(錦川)의 본류는 서하면 반정마을 앞 얼음골에서 흐르는 물과 비교해보면 물이 썩어가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돌과 바위에 물때가 올라 미끄럽다. 다칠까봐 겁이 났다. 상류에 저수지를 만들면서 흘러내린 진흙이 돌에 붙어 물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너럭바위를 흐르는 청류에 발을 담그며 더위도 저만큼 물러나 앉고 시리도록 맑은 계곡의 물줄기도 가슴속으로 흐르는 것을 느끼며, 선비들의 풍류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는 계곡이었기에 더욱 아쉬움이 컸다.

함양의 옛 지명은 천령이다. 하늘과 맞닿는 고개, 하늘이 내린 민족의 명산인 지리산과 덕유산 등 해발 1000미터 이상의 높은 산이 15개나 되는 산고수장의 고장이다. 깊고 높은 산을 끼고 있으니 계곡이 아름답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이름으로 미루어볼 때 빼어난 경치가 숨어있을 듯하다.

그중 남덕유산의 연봉인 기백산, 황석산, 월봉산, 망운봉 등으로 둘러싸인 안의면 일대는 계곡미가 빼어난 곳으로 이름나 있다. 화림동 계곡은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 곳이다.

꽃과 나무가 무리지어 피고 자라는 계곡이라는 화림동 계곡은 산자수명한 경관이 널리 알려져 있다. 화림동 계곡을 흐르는 금천은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서상, 서하를 지나며 냇가에는 굴곡이 많아 그 곳에는 여울 되고, 평지가 나서면 고요히 담겨진 듯 흐르는 못이 된다.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돌로 깊은 못과 맑게 흐르는 물로 이뤄진 계곡이다.

안의에서 봉전까지 10㎞의 경치 좋은 골짜기는 정자문화의 메카로 불리는 곳답게 금천 넓은 암반위에 많은 정자들이 떼로 모여 농월정,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을 이루고 있다.

계곡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농월정이다. 계곡에 비치는 달을 희롱하면서 풍류를 즐긴 풍류객들의 발길이 잦을게 뻔하다. ‘달을 희롱하며 풍류를 즐긴다’는 농월정은 넓은 너럭바위위에 그림같이 올라앉아 있다. 뒤편은 소나무가 울창한 산자락이고, 앞은 너른 반석이 펼쳐져 있는 계곡이다.

이 반석이 ‘달빛을 비추는 바위’라는 뜻의 월연암(月淵岩)인데 탁족의 명소로 이름이 높다. 이름처럼 물속에 떨어지는 달빛이 솔바람에 일렁이며 객들을 희롱해 여름밤 야영과 산책도 결코 지루하지 않다. 누각에서 내려오는 길 오른쪽에 바위에 농월정을 지은 지족당 박명부가 지팡이 짚고 신을 끌던 곳이란 뜻의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銶之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농월정에서 황암사 입구에 이르는 반석과 계곡은 예전에는 여름 휴가철이면 비좁을 만큼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영남(嶺南) 제일의 동천(洞天·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피서철이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던 화림동(花林洞) 계곡이 물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나면서 관광객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다. 하지만 대책은 전무한 실정이다. <사진: 함양군>

농월정에서 맑은 물을 오른편으로 끼고 서하 방향으로 국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장만정의 후손이 세웠다는 동호정이 기다리고 있다. 동호정은 맑고 진한 감색 빛을 띈 여울 못을 이룬 호반에 서 있어 그 주위의 경관이 수려하여 많은 길손들이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다. 노송에 둘러싸여 있어 멋스러운 동호정은 추녀 네 귀에 세운 활주가 활달하고 나무의 울퉁불퉁 구불구불한 멋을 자연스레 살린 1층 기둥이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 통나무 두 개를 잇대어 비스듬히 세우고 도끼로 내리쳐 홈을 만든 계단도 운치 있다.

정자 앞 계곡풍치도 멋지다. 200여평 넓이의 암반인 차일암이 섬처럼 우뚝 솟아있다. 차일암에는 오랜 세월 계곡물에 깎여 군데군데 분화구처럼 파인 웅덩이들도 있어 눈길을 끈다. 비가 온 후에 차일암 가운데에 생긴 작은 웅덩이에 고인 물이 암반 양쪽으로 흘러내리는 풍경도 볼 수 있다.

동호정을 지나 다시 물길을 거슬러 약 2㎞를 서상 방향으로 올라가다보면 도로가 획 굽어지며 새들(봉전·鳳田)마을이 보이는 지점의 오른쪽 도로변에 우뚝 선 바위가 있다. 꼭 삼층장을 얹어놓은 듯하다 하여 ‘농바위’라 한다. 농바위를 지나면 군자정을 만나게 된다. 군자정은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노송과 여러 가지 나무들이 감싸고 있는 가운데 서있다.

군자정은 조선 성종 때 학자 일두 정여창 선생이 유영하던 곳으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봉전마을 정선 전씨 입향조인 화림재 전시서 공의 5대손인 전세걸, 세탁이 세운 정자이다. 일두 선생이 이곳을 자주 찾은 것은 풍광이 수려한 탓도 있지만, 봉전마을이 처가 곳인 때문으로 여겨진다. 부인은 조선조 정종임금의 아들 도평군의 따님으로 도평군이 잠시 봉전마을에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군자정은 선비들이 계곡을 끼고 앉아 시문을 주고받았음직한 물가 너럭바위 위에 사뿐히 올라앉아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의 조촐한 누각으로, 거연정의 풍류를 관조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기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군자정에서 300미터 쯤 위쪽에 거연정이 자리 잡고 있다. 거연정은 무지개다리인 화림교라는 이름의 작은 철교를 통해 드나들도록 되어 있다. 주변의 노송과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다. 검푸른 소와 큰 암석들, 울창한 숲도 거연정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유홍종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말한 것처럼 거연정은 계곡의 풍경을 바라보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풍경 안으로 과감하게 들어가 있어 정자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누각에 올라 주변 계곡의 풍치를 바라보는 것보다 멀찌감치 떨어져 거연정의 풍치를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더 운치 있다. 화림천에 흐르는 물이 정자를 휘감은 듯 굽이굽이 흐르며 기암괴석이 주위를 감싸고 있어 한 폭의 동양화가 된다.

화림동 계곡은 안의 광풍루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요즘은 농월정에서 시작하여 거연정에서 끝난다. 산수가 빼어난 곳이면 으레 누대나 정자가 서게 마련이다. 정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풍광이 수려하다는 뜻이다. 화림동은 누대나 정자로 미루어보면 명소임이 분명하다.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즐기던 풍류객들은 화림동 계곡의 이 정자들을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다. 이 정자들은 조선시대 풍류객들의 질펀한 놀이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정자는 풍류보다 자연에 대한 고압적인 위세가 더 많이 느껴지기도 한다. 머슴과 하녀들은 정자아래서 음식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고, 기녀들의 온갖 교태와 아양을 보면서 그야말로 ‘음풍농월’했을 양반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예부터 화림동 계곡은 널리 알려진 명승지로 해마다 봄에서 가을철까지 전국 곳곳에서 모여드는 관광객으로 붐볐다. 정자를 둘러싸고 녹음이 짙은 여름철에는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찾는 사람은 관광버스를 타고 잠시 왔다 가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자랑하는 정자문화와 역사적 유산을 향유하고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관람과 표피적 찬미보다 선비문화가 배어있는 화림동천을 살려야 한다. 화림동 계곡을 되살리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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