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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잊지 못할 장당골의 단풍이여!

서부경남신문
승인 2004.11.0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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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산행일시: 2004년 10월 31일
ㅇ산있는곳: 경남 산청
ㅇ산행코스: 내원사주차장-바깥장당-안장당-잣나무 숲-헬기장-무제치기폭포-새재삼거리-
한판골-새재-대원사
ㅇ산행시간: Am07:30시~ Pm16:10시

[지리산커뮤니티=이영진] 시월의 마지막 날! 몇 곳의 산 이름을 놓고 망설이다 결국은 또다시 지리 속으로 찾아든다. 그 중에서도 호젓하기로 손꼽히는 지리의 장당골로. 이 가을이 다 떠나기 전에 꼭 찾고 싶었는데 이제야 발걸음을 들이밀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할지…. 늦가을이라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게 날씨는 포근하고 하늘은 투명하게 열린다. 이른 시간이지만 몇몇의 등산객들이 내원사로 향한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풍기는 모습은 그리 산꾼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먼저 고즈넉하게 장당골의 들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내원사에 들러 대웅전과 내원사3층 석탑을 둘러본다.



▲ 가을의 전설! 장당골에는 2004년 가을의 전설이 차곡차곡 쌓인다. ⓒ이영진



▲ 장당골의 내원사 대웅전. ⓒ이영진

다시 걸음을 되돌려 내원사 주차장에서 발길 막아 놓은 곳의 로프를 넘어 낙엽이 뒹구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른다. 바람 한 점 없고 날씨는 온화하니 행여 지금이 봄날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이것저것 쑤셔 넣은 50리터 배낭은 점점 어깨를 짓누르고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니 금새 등줄기마저 촉촉해진다. 왼쪽 길 아래 장당골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걸 보면 지금 걷고 있는 이 곳이 너무나 조용한 탓이리라.

천왕봉을 떠난 가을은 이제 이곳 낮은 데까지 내려와 한바탕 자지러지는 가을 잔치를 벌이더니 벌써 떠남의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듯 초조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처럼 떠나가는 가을의 끝자락을 만나 보고자 찾아온 오늘의 장당골 산행은 그 시작부터 느낌이 좋으니 나름대로의 기대를 한껏 부풀린다.

이어지는 길, 장당골의 길. 유난히 가을날이 아름다운 이곳 장당골은 몇 군데의 물길을 가로 건너야 한다. 흘러가는 물 많았을 때 바위에 부딪혀 멍이 든 것인가. 유난히 물빛이 푸르니 말이다. 그 푸른 물빛에 반사되는 시월의 하늘은 흘러가는 물빛 못지 않게 푸르니 행여 물이 하늘이고 하늘이 물은 아닌지….

놓여있는 돌덩이를 딛고 건너던 승영이 녀석이 기어이 물에 빠지고 만다. 신발을 벗겨 양말을 쥐어짜고 한바탕 법석을 떤다. 손끝이 아릴 만큼 물이 시리다. 날씨는 따뜻하나 계절의 오고감은 어쩔 수 없는지 손끝을 적시는 차가운 계곡은 만추의 알싸함이 그대로 베어 있다.



▲ 장당골의 초입, 가을은 이제 이 곳까지 내려와 떠남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영진

쉼 없이 걷는다. 거의 평지로 이어지는 넓은 길은 모퉁이를 돌고 완만하게 내리막도 나오고 다시 살짝 오르막도 번갈아 나타난다. 차가 다녀도 전혀 문제가 없을 이 길, 이곳 장당골을 막아 놓은 것은 지리의 어느 곳보다 세속에 오염되지 않고 수달을 비롯한 온갖 동식물이 현존하는 보고이기 때문이라니 나름대로 이해도 된다.

걸음은 한없이 느려지니, 펼쳐지는 가을의 모습과 고향집 뜨락 같은 포근함이 물씬거리는 까닭이다. 곳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하늘도 바라보고, 단풍 물든 양쪽의 산도 바라보고, 아직 탐스러움을 잃지 않은 억새의 무리에서 진한 사색에 빠져 보기도 한다.

길가의 돌덩이에 주저앉아 잠시 땀을 말리고 완만한 경사의 길을 지나 다시 장당골의 계곡으로 내려선다. 계곡을 가득 메우며 널려 있는 바위덩어리에 올라서서 길게 이어져 흘러가는 계곡을 바라본다. 덩달아 바동거리며 올라서는 아들 녀석의 손을 붙잡아 바위 위에 세우니 물과 돌 밖에 없단다. 나의 눈에는 그밖에 다른 것들이 훨씬 더 많이 보이는데….

길은 또 계속된다. 남아 있는 마지막 올해의 단풍은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마치 불이 붙은 듯 하다. 속살 깊은 장당골, 정말 깊고도 깊다. 이어지는 길은 살짝 방향을 틀어 정다운 모퉁이 하나를 만들고 그 길 위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낙엽들이 그야말로 지천으로 쌓이고 쌓여 사색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지나간 사람이 별로 없었는지 낙엽은 쌓인 그대로의 모습이고 발길 흔적도 없다. 마치 초설이 내린 눈길을 맨 처음 걷는 것처럼 마음은 설레고 가슴은 요동치는 감동으로 일렁거린다. 정말 주체할 수 없는 격랑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밀려간다. 그 어느 곳에서보다 정말 가을다운 가을을, 낙엽이 수북히 쌓인 가을의 숲을 마음껏 거닌다. 차마, 떠날 수 없는 아쉬움을 가득 안고서….

비몽사몽으로 길을 걸었다.
떠나가는 가을의 소매를 부여잡고 낙엽은 발 밑에서 속삭였으며 한들거리는 실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마른 잎사귀를 보며 "해는 서산에 지고 쌀쌀한 바람 부네" 잊혀진 노랫말도 떠올랐다. 행복했다, 참으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살아가면서 힘듦도 걱정도 모두다 다 잊어버리고 나만의 감정에 취해서 낙엽을 쓸며 걸었다. 덩달아 아들놈도 발끝으로 낙엽을 쓸어보고….



▲ 장당골의 가을길. 낙엽과 사색과 그리고 생각이 혼재되어, 또다시 걷고 싶은 길. ⓒ이영진

세월은 그 무엇을, 아무것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살고 있는 내가 오늘을 더 길게 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음이다. 세월이 흘러감으로써 청춘도 사라지고 대개의 것들은 기약도 없이 떠나가는 것이다. 다만 그 부스러기들이 잔해로 남아서 한 때의 그 시절을 되돌아보게 할 뿐이다.

장당보호소 부근의 허물어진 이 잔해에서 흘러가버린 세월을 되돌려 본다. 한 때 이 부스러기는 온전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서 망각으로 묻혀버린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성시켰을 터이다. 이제 그 지난날의 이야기들은 아는 사람만이 가물거리는 기억으로 반추 해볼 뿐이다.

다시 발길은 계속되고 또 한번 단풍이 물들고 잎사귀 풍성히 내려앉은 만추의 길을 지난다. 정말 이 곳에서 하룻밤 묶어 가고 싶다. 한 켠에 저 떨어진 이파리 주워다가 조그만 모닥불 피워 놓으면 낙엽 타는 냄새가 구수하게 파고들텐데.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면 저 잎사귀에는 밤새 하얀 서리가 내려앉을 것이고 다음 날 이른 새벽 잎 가장자리 하얗게 둘러쳐진 흰 서리의 또 다른 아름다움에 흠뻑 취할 수 있을 텐데.

모퉁이를 돌아 길은 계속되고 낙엽의 두께는 그 깊이를 더해간다.
조릿대의 푸른 잎사귀와 어우러짐을 더하며….

계곡에 이르러 잠시 걸음을 멈춘다. 골짜기에는 타는 듯한 단풍이 마지막 혼을 불사르는 듯 초연해 보이고. 계곡의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눈에 드는 것은 온통 붉은 색뿐이니 행여 이 장당골에 불이 붙은 건 아닌지…. 마치 속살을 내보여 수줍어하는 처녀의 모습으로 아무도 없는 골짜기에서 벌겋게 물든 단풍은 햇살에 더욱 상기되었음이 역력하다. 단풍에 취했던 아쉬움을 떨쳐내고 계곡을 건너 길을 잇는다.



▲ 이 곳을 건너면 낙엽송 숲과 잣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힘든 산행길이 기다린다. ⓒ이영진

길은 우거진 숲 속으로 가늘게 이어진다. 오름이 계속될 수록 숲은 우거지고 간간이 다가서는 계곡의 물도 현저히 줄어든다. 숱하게 넘어지고 쓰러진 나무들도 지나며 점차 물들어 가는 낙엽송 밭의 황금색 단풍빛깔에 놀라기도 한다. 사람의 흔적도 없고 길은 희미하며 얽히고 설킨 거미줄이 얼굴에 달라붙는다. 검정색 등산복이 이내 후줄근해진다.

인적이 들려 다가서 보니 잣을 따고 있는 사람들이다. 차림새하며 따고 있는 모습이 주인은 아닌 듯 하다.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한 그들을 뒤로하고 계속 산길을 잇는다. 몇 군데에서 사라진 길 찾기에 시간도 허비해 가면서. 고도계는 벌써 1,000m를 넘었다.

드디어 그 황금능선에서 이름을 떨치는 조릿대의 터널이 시작된다. 그러잖아도 힘겨운 오르막에 허리를 펼 수 없을 만큼 빽빽한 조릿대의 터널에서 승영이 놈은 금새 꾀죄죄한 모습으로 변해 버리고 내 모습 또한 말이 아니다. 조릿대 터널이 끝나고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올라선 헬기장, 그야말로 눈이 시린 물빛 가을 하늘이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어찌나 푸르던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치밭목산장도 산허리에 걸쳐있다.

흐르는 물이 약해진 무제치기 폭포가 바로 지척이니 이제 주등산로에 이른 것이다. 배낭을 풀어 라면을 끓이고 느긋한 점심을 즐긴다. 바로 머리 위까지 내려온 햇빛이 가을날답지 않게 따갑게 느껴진다.



▲ 무제치기 폭포. 계속된 가뭄에 물은 겨우 명맥만 유지한 채 흐르고 있었다. ⓒ이영진

무제치기 폭포에 들렀던 발길을 되짚어 이제는 고속도로처럼 뚫린 주등산로를 따른다. 마음 같아서야 당연히 치밭목능선을 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승영이에게는 무리일 듯 싶기 때문이다. 무제치기교를 건너 돌덩이들이 어지럽게 널린 길을 이어 새재로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서 한판골로 발길을 돌린다. 거리상으로는 심밭골로 내려서는 게 빠르지만 시간상으로 새재로 향한다 해도 충분한 까닭이다.

내려선 새재에는 벌써 해가 뉘엿거리는 해거름이다. 곶감을 깎아 시렁에 걸던 주인집 아낙이 말을 건넨다. 이 곳은 해도 일찍 떨어지고 해가 떨어지면 곧바로 한기가 몰려온다고. 어린애도 있고 하니 서둘러 내려가란다.

시렁에서 가을이 무르익는다. 노랗던 곶감의 빛깔은 점차 붉어지고, 가을은 곶감의 빛깔이 변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떠나간다. 10月도, 가을도….
그러나 장당골의 가을 모습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매김하여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소중한 오늘 하루는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으로 사라지겠지만 철들지 않은 어린 시절의 힘들었던 산행이 기억으로 남아서 가끔씩 되새겨 보는 그런 2004년의 가을의 전설이 되기를 바란다.

대원사로 내려오면서 바라본 유평계곡의 물빛은 너무나 시리게 푸르렀다. 그 물빛에 반추되는 하늘빛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