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푸른 산청 거주.

내 부모님은 대도시에 살고 있고, 나는 몇 해 전부터 이 곳 산청에 내려와 살고 있다. 처음에 산청에 오게 된 건 대안학교에서 일하게 되면서인데, 살다보니 산청이 마음에 들어 학교나 직장과 상관없이 앞으로는 이곳에 살아봐야겠다 결심했다. 그러다 지난해에는 산청에서 나고 자란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올해 5월, 평생을 서로 돌보며 살기로 약속하고 결혼식도 올렸다.

도시에 살던 적당히 가난했던 우리 가족은 늘 아끼고 참으며 살았지만 나는 그 가난을 벗어나야 겠단 생각은 별로 하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가난을 긍정까지 하진 못했지만, 벗어날래도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자리라고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러다 산청에 와서 지내는 삶은 참 단순하고 풍요로웠다. 심심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도시로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애써 참고 견디지 않아도 저절로 소박해지고 단순해질 수 있는 시골살이가 마음에 들었다. 텃밭에서, 이웃 텃밭에서 쉼없이 먹을거리가 나니까 마트에 갈 일도 줄어들고,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만했다. 안 보면 안 될 것처럼 신작 영화를 챙겨보고, 때마다 필요한 걸 사러 갔다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이 필요해지는 삶을 살았는데 그것 없이도 충분했다. 영화대신 날마다 똑같고 날마다 새로운 하늘과 강을 봤고, 필요한 게 생기면 ‘굳이 그걸 사러 진주까지?’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눈앞에 화려한 건물, 새로운 상품들이 가득한 도시에서는 참기 어려웠는데,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결혼하고 보니, 내 눈에는 도시에 살던 우리 가족에 비해 시댁의 살림과 시댁 식구들의 마음이 풍족해보였다. “몰랐는데 당신 정말 잘 사는구나. 모두 여유로워 보여”하고 농담반 진담반의 시댁 감상을 던졌는데, “에이~ 잘 사는 건 아니야. 그리고 다들 매일 일만 하잖아”한다. “식구가 먹고 싶은 거 있을 때 돈 생각하면서 참지 않아도 되잖아. 그거면 잘 사는 거지” 그런 시댁의 편안한 생활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부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다행히 내가 결혼하던 그쯤부터 우리 가족도 전보다는 차츰 더 편안한 삶을 누려가고 있었다. 조금 넉넉한 평수의 집으로 이사를 하고, 언니가 하던 일도 잘 풀려간다고 했다. 그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내가 행복하게 지내고, 좋은 인연을 만나서 모든 게 잘 풀리는 거라고 믿었다.

얼마 전엔 아빠가 새로운 일을 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편의점을 열게 되었다고. 마침 그 편의점 브랜드는 내가 예전에 알바를 몇 번 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은 아니다. 당시 나는 ‘알바노조’ 회원이었는데, 가맹점과 알바 노동자에 대한 본사의 무책임한 태도에 대해 규탄하는 시위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시위에서 나는 해당 편의점 알바노동자를 대표해 발언하며 “다시는 그 편의점의 알바도 고객도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요즘도 별 수 없이 종종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 날 시위에서 내가 했던 말 때문에 늘 불편한 마음이 한 구석에 남아있다. 편의점에 들를 때 마다 적어도 그 불편함을 완전히 잊고 살지는 말아야겠다고 그 때보단 몇 발 물러선 다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아빠가 그 편의점을 열게 되었다니. 이젠 한 식구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느낌이 들어 왠지 찝찝했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아빠는 “니가 잘 아니까 와서 좀 도와줘야겠다. 아빠는 잘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며 SOS를 보냈다. 사실 누구든 프랜차이즈 매장을 열고, 판매 경쟁에 뛰어드는 일을 시작한다면 나로선 축하할 일이라기보다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하지만, 모두가 축하하고 응원하는 마당에 가족인 내가 분위기 망치는 소리를 할 순 없었다. 2~3일 정도 도와드리면 안정이 되겠지 하고 가보았더니, 한 달을 꼬박 가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게다가 내가 알던 총명한 아빠는 어디 가버렸을까. 아빠는 시력도 나빠지고, 무거운 것 들 때도 이전 같지 않았다. 심지어 아빠의 점포를 관리하는 본사 직원은 만날 때마다 아빠를 이런 새로운 시스템과는 맞지 않는 구닥다리 취급하는 것 같았다. 별 말도 아니었는데, 난 아빠가 무시당하는 것 같아 몇 번이나 울컥하고 말았다. 내가 아는 아빠는 뭐든지 척척 해내는 신세대 아빠였는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난 아빠의 실수와 모자람들을 만회하고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더 열과 성을 다해서 일을 도왔다. 쉴 새 없이 물건을 나르고, ‘잘 팔리게’ 진열하고,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 메모도 해뒀다.

며칠 꼬박 도와드리고 산청에 돌아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몸이 자꾸만 달리려고 하는 것 같고, 머리도 더 빨리 빨리 뭔가를 생각해내려는 것 같았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자꾸 편의점 생각만 났다. 그러다가도 시집을 한 권 펼치면 마음이 한없이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운 문장들만 머릿속에 남았다. 산청에서 가동되고 있던 ‘느리게, 단순하게, 그대로’ 서버에 제동이 걸리고, ‘더 빨리, 더 많이, 더 사!’ 서버가 긴급 가동되면서 서버 간 충돌이 생긴 것이다.

산청에 강이 보이는 신혼집도 생겼겠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일들로 나의 일상을 가득 채워 살아가고 싶었는데, 아빠의 편의점 개업 사건(?)처럼 나의 뜻과 무관하게 흘러가고 마주치는 삶의 크고 작은 일들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 아직 완전히 자연스럽지는 못한 나의 내면도 그렇다. 이렇게 내 안팎에서 장애물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지만 뜻대로 안 풀린다고만 생각하면 너무 지루해 질테니까, 나의 리듬을 찾아 헤매는 이 뒤뚱뒤뚱한 걸음들도 사랑해주겠다고 마음먹는다.

가끔씩 다른 데로 발이 빠지기도 하지만, 특히 부모님, 가족의 말에는 금세 마음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간절히 바라며 간절히 살고 싶은 그 곳으로 걸어가게 되어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내게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를 떠올리며 편지 보내주는 친구가 있고, 수수밭이 내 마음같다는 노래를 지어 부르는 친구도 있고, 오랜만의 통화에 너는 참 아름다운 존재라고 말해주는 친구도 있다.

곁에 살아가는 친구들의 애틋한 안부들을 떠올리며 나의 ‘느리게, 단순하게, 그대로’ 서버를 회복하고 오늘도 느리게, 단순하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살기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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