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시인)님께서 보내주신 칼럼입니다.

느리게, 천천히, 여유롭게, 한가하게, 둘러보며, 만만디 걸어가다 보면 비로소 꽃이 피고 새가 운다. 빨리, 서둘러, 정신없이, 앞만 보고 가는 길엔 자주 붉은 신호등만 켜질 뿐이다.

빠르다는 것은 직선의 마음으로 오직 결과와 표적지, 그리고 죽음뿐이다. 가는 길, 즉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이 거꾸러질 때까지 우리의 등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직선과 곡선의 조화 없이 어찌 그림이 되고, 속도와 반속도의 조율 없이 어찌 노래가 되겠는가.   

전화보다는 편지가 반갑고, 보일러보다는 군불 지핀 토방이 더 아늑하고 따뜻한 법이다.

지난 2000년엔 낙동강 1300리를 걷고, 2001년엔 지리산 850리를 걷고, 2003년엔 부안에서 서울까지 틈틈이 삼보일배를 도우며 걸었다. 차로 달리면 이틀 거리를 100일이 넘게 걸렸으니, 어쩌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인생의 참으로 행복했던 '꽃 시절'이 바로 이 도보순례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가 지리산에 온지 6년만에 새롭게 알아차린 것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기차가 아무리 빨라도 레일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기가 제 아무리 빨라도 전깃줄을 넘어서지 못하고, 핸드폰이 제아무리 빨라도 배터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그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시간에 쫓기듯이 살면 그 시간은 더욱 가속도로 빨라지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면 시간도 따라와 아주 오래된 동무가 된다. 마음먹기에 따라 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나무와 풀과 새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도 결국은 마음의 속도 때문이다. 느리게, 천천히, 여유롭게, 한가하게, 둘러보며, 만만디 걷다가 풀꽃의 낮은 키로 엎드려 말을 걸면 풀꽃도 그 말을 알아듣는다. 나무를 껴안고 오래 있다 보면 그 나무의 가슴 떨리는 고백을 들을 수 있다.          

섬진강변에 앉아 흐르는 물에 귀를 기울이다 일어나 산책을 한다. 강물의 속도로, 내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의 속도로 걸어간다. 멀리 지리산이 아침 햇살을 받아 환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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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준비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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