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이 수필가, 소나무5길문학회.

빨강신호등에 발이 묶인 사람들이 우산을 받치고 서있다. 그들 중에서 나만 비에 젖는다. 일기예보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요즘 부쩍 심해진 건망증이 이런 불상사를 만들었다. 챙겨놓은 우산을 신발장 앞에 내놓고 그냥 나오고 말았다. ‘젠장맞을, 왜 이렇게 신호등은 안 바뀌는 거지.’ 횡단보도 건너편 빨강불빛만 째려보고 서있다. 비를 피하는 방법은 하나다. 신호가 바뀌면 번개처럼 뛰어가 버스정류장 부스에 몸을 숨기는 거다. 그런데 오늘따라 빨강신호가 왜 이리 긴 걸까. 점점 타들어가는 속내를 감추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서있다.

이때 여자 하나가 우산을 쓰고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우산끝단에 하양주름이 앙증맞게 잡혀있고 깜장 바탕에는 날씬한 아가씨가 여럿 그려져 있다. 우산 속 여자도 세련된 옷차림이다. 검은색 재킷에 검은색 미니스커트 그리고 하이힐을 신고 있다. 나는 여자가 들고 있는 우산이 부러울 뿐만 아니라 왠지 추진력 있어 보이는 그 여자의 옷차림도 부러웠다. 이게 뭐지. 내가 여자를 잠시 쳐다봤을 뿐인데 여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우산을 받쳐준다. 순간 이 사람을 어디서 만났지? 아는 사람인데 내가 몰라보는 건가. 기억을 짜내어 본다. 그래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얼떨결에 우산 속에 둘이 서있다.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봄비치고는 많이 오죠?”

그리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는다. 나머지는 내 몫인가. 말이 여기서 뚝 끊겨버리자 다시 침묵이 흐른다. 어디서 만났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드디어 생각의 방향이 바뀐다. 이 여자는 내게 무엇을 원할까. 분명 뭔가 원하는 게 있을 거야. 괜히 우산을 씌어주겠어. 모르는 사람한테, 어떡하지? 그때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순간 엊그제 딸이 한 말이 생각났다.

‘엄마, 진짜 무서운 세상이에요. 길 가다가 누가 뭘 줘도 받지 말고요. 누가 차창을 내리고 길을 물어도 차 가까이 가서 가르쳐주지 마세요. 특히 할머니들 짐도 무턱대고 들어주지 말고요. 맛보라고 내미는 멸치, 다시마 이런 건 절대 입에 대지 말아요. 누군가 말 걸어오면 주위에 검은색 봉고차가 있는지 살펴보고요. 엄마! 제발, 잘못하면 끌려간다고요.’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눈동자를 굴려도 봉고차는 보이지 않았다. 내심 이런 내가 웃기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함양군 상림공원을 찾은 관광객들이 우산을 쓰며 걸어가는 모습. <자료사진: 김용만 함양군청 주무관>

여자와 발을 맞춰 건널목을 건넌다. 그다지 큰 우산이 아닌데 내 오른쪽 어깨까지 받쳐주고 있다.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머리만 안 맞으면 됩니다.”

“아니, 저도 괜찮습니다.”

“그럼, 볼일 잘 보세요.”

“저기…,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제가 덜 젖었습니다.”

짧은 대화를 하는 동안 건널목을 다 건넜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여자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대로 돌아섰다. 돌아서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혼잣말로 나 자신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너 미쳤구나. 미쳤어! 상대의 순수한 배려를 색안경을 끼고 보다니.’ 오늘 자칫 몸과 마음이 비에 젖어 엉망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 여자로 인해 내 마음이 봄날처럼 화창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느 때보다 맑고 곱다. 색색의 우산도 어여쁘고 물기 가득 머금은 나무마다 반짝이는 연둣빛도 사랑스럽다.

오늘 만난 그 여자는 내게 고운 봄비가 되었다. 이제 봄비 내리는 날이면 그 여자 우산 속이 궁금해질 것 같다. 올봄은 이렇게 예쁘고 앙증맞은 또 하나의 추억 담긴 꽃밭을 만들었다. 어디 사는지도 모를 여자의 안녕을 바라며 봄비 속에서 받은 사랑과 작은 용기를 꽃밭에 묻어둔다. 늦지 않게 싹을 틔워 세상과 어우러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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