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송강마을 거주, ‘까르페디엠’ 회원.

송강 마을로 이사 온 지 4년째 접어들고 있다. 차를 타고 매일 같이 지나다니는 마을 풍경에 익숙해졌다. 계절 따라 바뀌는 들녘을 처음에는 무심하게 지나치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햇볕과 바람과 비의 조화 속에 작물들이 자라는 모습이 신기하고 궁금해서 잠시 가는 길을 멈추고 바라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차를 정비소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어서 당분간 남편 출근을 도와야 했다. 아침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도로가에 서 계셨다. ‘무슨 일이지?’하는 호기심이 생겼지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고 그냥 지나쳤다. 다음 날 아침에도 그 분은 도로가에서 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참다못해 남편한테 물었다.

“저 분은 왜 저러고 있는 거여?”

“밭에 씨앗을 심어 놓고 싹이 나오기 전까지 새들이 먹을까봐 지키는 거 아이가?”

시골에서 자란 남편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문득 가을이면 들녘에 허수아비를 세우고 반짝이는 줄을 설치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농부가 새떼로부터 곡식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남편 출근을 도운 지 삼일 째, 어김없이 그 분은 밭에 나와 있었다. 밭에 그물을 덮어놓으면 될 텐데 아주머니 밭은 범위가 커서 엄두가 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새들도 영리해서 사람이 지키는지 허수아비가 지키고 서있는지 아는가보다. 2주 넘게 남편을 출근시키는 동안 아주머니는 한결 같은 모습으로 밭을 지키고 서 있었다. 새떼와의 전쟁에 지쳐 갈 때쯤 밭에서 드디어 싹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밭을 바라보며 이젠 아주머니가 아침잠을 설치며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내일처럼 기뻤다.

우연히 부녀회장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 마을 어르신 한 분이 두세 평 남짓 되는 논에 벼농사를 짓는데 벼 수확 전까지 멧돼지의 침범을 막기 위해 논 옆에다 텐트를 치고 주무신다는 거였다. 멧돼지가 무서울 법도 한데, 사람 냄새를 맡으면 멧돼지가 근처에 얼씬도 않는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논을 포기할 수가 없어 지금껏 농사를 지어오고 있는지 모른다. 나라면 무서움과 불편함 때문에 진즉에 포기했을 일이었다. 마트에서 돈만내면 얼마든지 맛있는 쌀을 사 먹을 수 있는데도 힘들게 농사를 고집하는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이 순리라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농사를 짓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막상 내 눈으로 확인하고 보니 우리 밥상에 오르는 기본적인 먹거리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농사를 짓는 일은 인내와 노력의 결실이다. 내가 험준한 산세로 둘러싸인 송강 마을로 이사 오지 않았다면 논밭의 작물들이 무수한 시련과 농부들의 끊임없는 보살핌으로 자란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삼시 세끼의 고마움을 되새기고 있다.

세상에는 고맙고 감사해야 할 일들이 많다. 무엇보다 일차원적이고 기본이 되는 일이지만 대부분이 기피하는 일에 종사하는 분들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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