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소 독림가.

여보게, 창문을 여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네. 우리들의 순수시절 기억 저편에 있을 눈 덮인 초등학교 교정도, 백설천지인 우포를 날아오르든 기러기 우는 소리도 함께 다가오네. 저 멀리 지리산능선에 쏟아지고 있는 함박눈의 모습이 장관일세. 완벽한 대자연의 연출이 아니던가.

바로 창조주가 열었든, 또 열어가고자 했든 태초의 세상이 이랬던가? 늘상 그래왔던 생각이지만 오늘따라 나는 참 축복받은 이 땅에 태어났다 싶다네. 백설의 천지! 갈등도, 번뇌도, 욕심도, 시비와 미움도 없고, 그리고 바쁘지 않고, 까다로운 법도 필요 없었을 세상, 누구나 살고 싶은 세상이 아니던가.

누가 세월을 쏜살같다고 했든가? 어느새 일흔다섯에 또 하나를 더하려 하고 있네. 반 고개를 지났으니 속도감이 더해지리라. 너무 서러워 말게. 인문학이나, 노송나무나, 산삼의 높은 향기와 멎진 자태가 연륜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해마다 이맘때의 우리 모두의 마음이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보네. 지난날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대했던 뜨고 지는 해가 지금은 매일 감사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네. 이런 멎진 장관이 이제 나에게 얼마나 허락되어있을까 싶어 그런다네.

창조주여! 부디 새벽잠이 없게 하소서, 그리하여 뉘우치며 감사할 시간 많이 갖게 해주소서. 생각하면 참 나를 찾지 못한 혼돈의 오랜 세월이었네. 일흔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지금에서야 나를 혼란케 했던 안개 너머로 참 내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네. 그래서 서러운 생각이 많이 든다네.

나로 인해 힘들었을 인연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아보며 살 수 있도록 건강주소서. 나로 인해 아내가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할 수 있도록 일년을 십년으로 늘린 시간 주소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와 함께 할 시간 많이 가질 수 있도록 건강 주소서. 내일 아침 뜨는 해를 보지 못하고 떠나도 미련 남지 않도록 뒤돌아보며 살리라.

‘언더우드’의 기도문을 새겨가며 더 큰 복은 바라지 않으며 살리라. 고전의 가르침을 읽기만 하지는 않으리라, 말하기보다 듣는 쪽을 택하리라, 칭찬을 쫓아가는 불나비가 되지 않으리라. 나의 안락보다 이웃에 나누고 베품에 솔선하는 삶을 살리라.

여보게, 이즈음 우리 곁을 떠난 인연들도 많았지? 그 중에 서러움을 다 토해내지 못해 오열하며 떠나보내야 했든 아버지도 있었네. 회자정리라 하지 않던가! 빛의 속도로 가도 200억년이 걸린다는 별이 있다는 광활한 우주가 아니던가, 그 속에 나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네.

우리 언제 억년의 세월이 녹아있는 우리고향 우포에서 만나세. 그곳에서 우리들의 순수 시절로 가는 타임머신을 함께 타보세, 엄마의 기다림과 아버지의 회초리와 할머니의 옛날 얘기와 할아버지 잠들어 계신 그곳 말일세. 그때 사랑하는 손주 손잡고 오게. 또 막걸리 하나도 잊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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