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청한 재경 함양군 향우.

아내가 씩씩거리며 집에 왔다. “망할 놈의 영감탱이, 나를 보고 뭐～할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4월 첫 주말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가고 있는데 종이박스를 잔뜩 실은 리어카가 아내 바로 앞에서 ‘휘청휘청’ 가고 있었다. 아내는 모임에서 과식한 뒤라 소화도 시킬 겸 인기척을 내지 않고 리어카를 조심조심 밀면서 건널목까지 갔다. 처음부터 이를 알아차린 듯 리어카 주인은 땀을 훔치며 “할메! 욕 받소, 고맙소” 하더란다. 아내는 대꾸도 없이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냅다, 뛰다시피’ 귀가했다. “차라리 ‘아지메’라고 하면 어디 덧나나, 할메가 뭐꼬?” 오는 말이 불편하니 가는 말도 거칠다.

60대 중반을 넘긴 아내는 외손자가 4명이나 있어 ‘할머니’가 맞지만 밖에서 알지도 못하는 이들로부터 대놓고 ‘할머니’라 불리기가 싫고, 아직 익숙하지도 않다는 푸념이렷다. 게다가 반말과 사투리가 뒤섞인 ‘할메’와 친할 리가 없다.

그날 저녁 TV와 인터넷은 “수도권 열차 안에서 30대 여성이 ‘아줌마’라는 말에 기분이 나빠서 흉기를 휘둘러 3명을 다치게 했다”는 뉴스가 도배를 했다. 이튼 날 신문은 ‘호칭 범죄, 호칭 인플레’ 제목으로 칼럼까지 게재했다. 30대면 아줌마, 아저씨라고 불릴 수도 있는 나이지만 그 칼럼은 “50대 여성이 ‘통화소리를 줄여달라’며 부른 ‘아줌마’ 호칭에 수모를 당한 듯 분노가 치밀었나 보다”는 분석까지 내놓았다.

내 경우 오래됐지만 손자와 동네 중학교 잔디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체육선생님인 듯한 이가 다가 와 “이것 보세요! 일과 중에는 학교에 들어오면 안됩니다”고 했다. ‘이왕이면 선생님!이라 부르면 좋을 텐데’하며 살짝 삐졌던 기억이 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불리는 ‘비하적 호칭’은 분명 기분 나쁠 수 있지만 정형외과, 한방병원 등에서 환자를 아예 ‘어머님! 아버님!’으로 부르는 과한 호칭, 식당 등에서 남용하는 ‘이모, 삼촌, 언니’ 등 무심하게 부르는 호칭도 거북할 수 있다.

미국영화 ‘여인의 향기(1993년)’에서는 사고로 시력을 잃은 퇴역한 중령이 주말에 자기를 돌보는 아르바이트 고등학생이 “선생님! 선생님!”하는 호칭이 싫다며 경기(驚起)를 일으키는 괴팍한 장면이 몇 번 나온다. 박완서의 단편소설 ‘황혼’(1979년)에서는 시집온 젊은 여자가 늙은 여자를 결코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땅히 ‘어머니, 시어머니!’라고 불러야 함에도 그게 싫어 대화의 방법까지 간접적으로 고쳐 나간다. 우리 집 노인네, 할머니로. 이것은 ‘젊은 여자’가 ‘늙은 여자’를 시어머니로서 존중하기보다는 그저 봉양해야하는 존재이자 ‘근심’거리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부모를 관심과 애정이 없이 대하는 젊은 세대의 윤리적 무관심과 이기심을 보여준다.

이렇듯 불리는 사람이 원하지 않는 호칭과 불러주기를 원하는 호칭이 각기 있지만 불변인 ‘정답’은 없다. 아줌마나 아저씨, 당신은 시비걸기 직전의 호칭이 되었고, 손님은 사라지고 ‘고객님’으로, 식당 종업원은 ‘여기요, 저기요’로 바뀌었다.

오죽하면 국립국어원에서조차 “우리의 말은 고정적이지 않고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사회가 변하고 사람들 간의 관계가 다양해짐에 따라 언어 예절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며 호칭 역시 ‘표준’이라는 엄격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고 함께 소통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내가 들었을 때 기분 좋은 말은 남이 들었을 때도 분명 기분 좋을 것이다.

내 경우 남자 호칭은 ‘선생님’ 또는 ‘사장님’이고, 여자 호칭은 ‘사모님’ ‘여사님’이다. 아직까지 별다른 부작용이 없고 듣는 얼굴도 부드럽다. 그렇지만 나보다 나이가 아래인 듯한 젊은이들에 대한 호칭은 쉽지 않다. 이름을 알 때는 “~ 씨”지만, 이름을 모를 때는 얼버무리기 일쑤다. ‘호칭 스트레스’가 있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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