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 산청군 시천면에서 예원펜션 운영.

어린 시절, 노는 것이 전부인 내게 여름은 절정이었다. 집에서 10분 정도 산 쪽으로 올라가면 사찰이 있고 그 밑으로 누구도 쉽게 찾을 수 없는 희한한 계곡이 있다. 아래쪽은 남탕이고 약간 위쪽 큰 바위로 둘러싸여 있는 곳은 여탕이다. 가운데가 움푹 패었고 물 깊이는 우리 키만큼 되는 제법 넓은 계곡이다. 우린 여탕과 남탕의 경계를 정했다.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규칙도 정하고 어기면 심할 정도로 서로 응징을 해댔다. 설령 어기지 않았어도 사소한 티끌을 잡아 공격하고 잔소리를 해댔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그렇게 떠들고 싸우는 게 노는 거였다. 어둑해질 때까지 놀아도 하루는 왜 그리 짧은지 아쉽기만 했다. 질주하는 굴렁쇠처럼 나는 매일 그렇게 내달렸다.

또 여름이면 자주 가족과 함께 해운대로 갔다. 뜨거운 햇빛 아래 종일 물속에 있었다. 조금 추워지면 햇빛에 달궈진 모래에 파묻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수영하다 혼자 먼 수평선으로 떠내려가는 꿈을 꾸고 울면서 잠에서 깼다. 새하얀 모래밭에 앉아 두꺼비집 놀이를 하고 모래성 쌓기도 했다. 준비해간 음식을 먹으면 미지근했고 수박이 입속에서 모래와 함께 씹혔어도 맛은 최고였다. 부모님이 집에 가자고 하면 더 놀고 싶다고 떼를 썼다.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에 빠졌고 깊이 꿈나라로 가기도 했다. 둥실 몸이 떠올랐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요동쳤다. 하루종일 파도 타느라 신났으니 그런 꿈을 꾸었으리라. 졸다가 창문에 머리를 부딪혀 깨기도 했다.

햇볕에 그을려 콧등과 어깨가 빨갛고 따가워서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이었다. 피부 껍질이 벗겨져도 또 바다를 찾곤 했다. 가끔 왜 그토록 노는 것에 빠져 살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방학이 끝나면 이웃 어른들이 “니 베트콩 사람이가?” 놀릴 정도로 까맣게 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나의 등쌀에 못 이겨 하루가 멀다고 바다로 갔던 것 같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한겨울 파란 타일 바닥처럼 마음이 시리다.

“네, 손님 뭐가 필요하세요?”

“수건 더 주세요. 숯불도 피워 주세요,”

우리 펜션을 찾은 손님들 요구가 많다. 숙박업을 시작한 지 십여 년짼데 특히 여름이면 힘들다. 손님들이 여기저기서 불러대는 통에 지치고 짜증이 났다. 도망가고 싶었다. 습도가 높고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날이 길어지면서 점점 지쳐갔다. 손님 오는 게 싫고 돈도 싫어졌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하루에 서너 번 씻어도 금방 땀으로 젖었다.

어릴 적 그토록 좋았던 여름이 이젠 힘들어서 여름 오는 게 무서울 지경이다. 그렇지만 이런 하루하루가 소중한 내 삶이 된다는 걸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알게 되었다. 이마저 언젠가 떠올릴 추억의 한 자락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주름살 골짜기는 서서히 옅어지고 어느덧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이 되었다. 내 집을 찾아와준 손님이 소중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높은 습도에 땀이 흐르고 온몸이 지쳐 쳐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여름날이 마냥 행복했던 그 가시내는 순식간에 녹아 없어진 솜사탕처럼 바삐 가는 시간 속에 어느덧 60을 넘고 있다. 누군가 내게 ‘언제 적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가?’ 묻는다면 난 단연코 국민학교 시절이라 말할 것이다. 붙잡아도 잡히지 않는 물안개 같은 그 시절,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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