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련 산청군 삼장면 거주.

‘벼이삭이 빼쪼롬이 고개를 내밀고 있네!’

무심히 들판을 지나던 나는 자연의 경이로움에 환호성이 올라왔다. 올봄에는 가뭄으로 축 늘어진 엿가락처럼 목이 타서 모두가 힘들어했다. 또 평년보다 먼저 온 장마에 한 달이 넘게 시달렸다. 뒤이어 쫓아온 무더위는 숨조차 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지구는 엘니뇨현상으로 끓고 있었다. 이렇게 힘든 계절의 변화 속에서 벼는 땅의 은밀한 말에 귀 기울이면서 열매를 키우고 있었나 보다.

어린 시절 우리 집 가훈과 같은 할머니 말씀은 ‘자랑 끝에 쉬(벌레알) 생긴다’였다. 만사에 겸손하고 신중하라는 뜻으로 우리에게 종종 들려주었다. 우리네 어른들은 칭찬에 인색했고 근엄했다. 구시대 어른들과 살아온 생활은 자신감보다 좌절감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호기심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여자라는 이유로 깡그리 무시되었고, 요조숙녀가 되기를 원하는 어른들의 요구에 조신하게 소녀 시절을 살았다. 튕기는 고무줄 같은 나의 성정은 해소할 길이 없었다. 다행히 나는 관운이 좋은 편이어서 일찍이 직장을 가질 수 있었다. 탈출! 탈출! 행복한 탈출은 이루어졌다.

가을운동회 연습이 한창일 때, 신작로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자태로 꽃을 피우고 꽃잎은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벌 나비 날아와 꿀과 화분을 모은다. 가는허리 부러질 애태움도 아랑곳없이 내 몸에 있는 것 다 내어 주고도 바람결에 웃고 있는 코스모스는 아름답기만 하다. 깊어가는 가을이 되자 꽃잎은 떨어지고 그 자리에 내년에 꽃피울 씨앗이 맺혔다. 학생들이 코스모스 씨앗을 한 홉씩 따서 학교에 가져오는 약속이 해마다 이어졌다. 어린 학생들이 코스모스 씨앗을 따서 모은 것이 한 섬이 되었다. 교장선생은 청와대에 연락했고 경부고속도로 주변에 뿌려 아름다운 강산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도 고속도로변에는 아이들이 보낸 코스모스가 하늘거린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시절이었다. 초가지붕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마을길도 넓혀졌다. 애향단 기를 들고 아이들은 줄을 지어 새마을 노래를 부르며 등하교를 한다. 먼 거리 통학을 하는 어린이들이 많았다. 교사들은 교통지도 겸 아이들 가정사항을 알아보는 가정방문도 자주 간다. 부락 애향단 별로 지도교사가 있다. 여선생인 나에게는 학교와 가까운 마을을 담당하게 배려해주었다. 아이들과 씨 뿌려 키운 길가 코스모스는 건들바람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허리를 서로 껴안고서 나에게 행복한 미소를 보내 주었다.

벼는 뜨거운 햇빛을 받고 무럭무럭 자랐다. 낱알이 무거워질수록 겸손하게 목을 숙이고 가을 들판을 황금물결로 만들었다. 벼는 농부의 손길을 항상 감사하고 고마워했다. 그 보답으로 황금벌판을 선사했고 농부는 잘 익은 벼 이삭을 보고 행복과 보람을 느꼈다. 나락을 거둬들인 들판은 황량하다. 낙엽이 다 떨어진 나무는 그 빈자리에 내년에 틔울 싹을 벌써부터 마련하고 있다.

이렇게 삶의 부스러기들을 털고 버림으로써 본질적인 삶을 이룰 수 있음에 감사하며 결실의 계절에 지나온 과거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짐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속에 사는 홀가분한 자유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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