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 산청군 시천면에서 예원펜션 운영.

고추 첫 수확이다. 한 달 내내 억세게 내리던 비를 맞고도 튼실하고 옹골차게 잘도 자랐다. 덥지 않은 새벽에 고추를 땄다. 검붉은 고추를 손아귀에 넣으니 단내가 솔솔 풍기어 온다. 고추를 깨끗이 씻어 건조기에 넣었다. 허리도 아프고 땀이 비 오듯 쏟아져도 노동의 가치를 얻었다. 즐거움이 온몸으로 휘감으며 자연이 주는 선물에 마음 그득해진다.

뒷산 너머 순식간에 올라온 태양이 뜨겁긴 해도 긴 장마 끝에 찾아와 줘서 고맙고 반갑다. 이슬 머금은 텃밭 채소들도 물기를 털어 내며 잠에서 깨어난다. 바람과 비와 햇살을 머금고 키가 쑥 자란 오이와 고운 빛깔로 내 마음을 훔친 가지를 따온다. 오이는 식전에 껍질째 먹고 가지는 쪄서 집 간장과 참기름만 써서 양념한다. 신선한 텃밭 채소를 바로 따와서 반찬을 만드니 혈관 속 피가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피아노건반 소리가 라디오에서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연주자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나도 잔뜩 신난다. 비 그친 뒤 햇살 내려앉은 풀밭 들꽃이 하늘거리며 춤추듯 내 마음이 들썩인다. 아침 밥상을 차려 남편과 마주 앉아 건강을 먹는다. 가지를 뜨거운 밥 위에 얹어 먹으니 그 맛이 마닐마닐하다. 남편과 밥 먹는 시간 자체를 즐기며 함께 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어김없이 찾아와 준 오늘, 선물 꾸러미를 풀어 헤치니 끝없이 행복이 나온다. 기억 창고에서 행복이 마구마구 뿜어져 나온다.

딸들이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아들 같은 사위 둘을 얻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고운 손주들을 얻었다. 꼬물거리는 새 생명이 신비로웠다. 세상 그 어느 꽃도 이보다 고울 수 없다. 팝콘이 터지듯 가슴에서 행복이 팡팡 터지며 나를 설레게 했다. 하루하루 자라며 할미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아이들 덕분에 나는 매일 보석처럼 빛날 수 있다.

손주들이 마당 구석구석을 다람쥐처럼 몰려다니며 쪼르르 내달린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우고 하늘로 퍼져나간다. 온몸에 땀범벅이 되어 할미 품으로 달려온다. 땀내가 달콤하다. ‘할머니 집에 살고 싶어요’ 새처럼 조잘거린다. 아이와 가슴을 맞대니 심장 펄떡이는 소리 그대로 나에게 전해온다. 뼈가 맞닿을 듯 꼭 안으며 손주를 느낀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으리라.

어릴 적, 누군가가 주는 선물을 받아 들고 좋아서 겅중겅중 뛰었던 날들이 기억난다. 생일 때나 가끔 받는 선물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선물을 받았다며 동네방네 친구 집을 다니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철부지 아이는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다. 시간이 흘러 세월을 논할 나이가 되니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물결치며 일렁이는 파도처럼 소소한 선물이 자꾸만 밀려온다. 이 세상에 선물 아닌 게 하나 없다.

건조기의 고추가 마르면서 달큰한 내가 온 마당에 퍼져 날아다닌다. 마른 고추가 되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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