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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의 차 이야기
김재웅 경남도의회 문화복지위원장.

함양은 지리산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리산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살아온 고장이다. 3도 5개 시군에 걸쳐 있는 광대한 지리산의 영역 중 함양의 마천·휴천 일대는 일명 내지리(內智異)라 불리며 예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일구며 살아왔는데, 그것은 넉넉한 지리산이 주는 다양한 물산 덕분이었다. 그러한 물산 중의 하나가 바로 차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차는 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간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져와 지금의 하동 쌍계사 일원에 심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이때를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후 지리산 일원에서부터 재배되기 시작한 차가 주로 기후가 온화한 남해안을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우리나라에 차가 본격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지리산 북사면에 위치한 함양 역시 차의 재배가 이루어졌으리라 능히 추측되는데, 조선 성종 때 함양군수를 역임했던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 조성했던 휴천의 관영(官營)차밭이나 지리산 일대에 전해 내려오는 호차(虎茶) 설화, 그리고 마천에서 채록된 차 노래 등은 이를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특히 점필재의 관영차밭 조성은 함양에 여러 의미를 지닌다. 엄천사(嚴川寺) 옛터에 자생하던 차나무 몇 그루를 발견, 여기서 채종해 관영차밭을 만들었는데 먼저 이미 차나무가 함양에 자생하고 있었다는 점. 둘째 당시 공납(貢納)의 폐단으로 있지도 않은 차가 함양에 부과되어 백성들에게 극심한 부담을 주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점필재가 그러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려고 애민정신을 보여준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차가 매개가 되어 목민관의 선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함양 향토사를 넘어 차의 역사에도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건이다. 차를 매개로 독립전쟁이 촉발되었던 미국의 보스턴 차 사건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우리 차의 역사라고 필자는 평가하고 싶다.

또한 호랑이와 아이가 찻잎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지리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호차 설화나, “초엽 따서 상전께 주고, 중엽 따서 부모께 주고, 말엽 따서 남편께 주고…”의 마천 차노래는 함양에도 차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특히 영원사(靈源寺)와 벽송사(碧松寺)를 위시한 함양의 여러 사찰들에서도 스님들을 중심으로 차가 소비되면서 함양의 차는 매우 명성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한 불교의 쇠퇴와 임진·병자의 양란의 극심한 피폐함 등으로 우리나라의 차문화는 전반적으로 후퇴한 모습을 보였는데, 함양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이에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 등을 중심으로 전남 해남·강진 일대에서 차의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 차를 재건한 분이 바로 사천 다솔사의 효당 최범술(1904~1979) 스님이었다. 스님은 일찍이 청년시절 박열 사건에 주역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의재 허백련(1891~1977)을 비롯한 여러 예술인들과 다도(茶道)로 평생 교유하며 민족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효당의 이러한 모임에 핵심적 역할을 한 함양 사람이 있으니 바로 그가 백아 양지환(1888~1964)이다. 함양읍 죽곡리에서 태어나 일본 명치대 및 일본대학을 나와 백산 안희제 등과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진주 일신여고보(현재 진주여고) 이사, 함양체육회 초대회장, 신간회 함양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암울한 왜정 치하에서 민족혼을 불러 일깨우셨다. 해방 이후에도 미군정청 경남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신생민보사 사장, 동아대 교수로 재직하였고, 말년에는 경남노인회 회장으로 몽양 여운형의 추도식을 매년 주관했다.

백아는 효당과 망년지우로 교유하며 한국 다도의 기초를 마련한 다인이었는데, 자신의 선친인 죽포 양주칠을 기리며 지은 죽곡리 소재 차군정(此君亭)에서 효당, 의재 등과 함께 차회를 열며 왜정 하 암울한 시기를 달래며 민족의 앞날을 모색하기도 했다. 백아는 해방 후 부산 동대신동으로 이주, 동아대 교수로 있으면서 장건상 국회의원, 양성봉 경남지사, 정재환 동아대 총장 등 지역 유지들과 차로서 모임을 갖으면서 민족문화 창달에 많이 기여했는데, 60여 년이 지난 오늘 백아의 이러한 공로가 잊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백아가 청장년기를 보낸 죽곡리 생가와 차군정 등은 그 흔한 안내판 하나도 없이 방치되고 있어 매우 안타까웠다.

이렇듯 함양의 차는, 처음 차가 전래된 신라시대 때부터 고려, 조선까지 매우 융성했을 뿐만 아니라 근래에도 백아 양지환이라는 함양 사람에 의해 새롭게 정립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이에 점필재가 조성한 휴천의 관영차밭 복원이나 마천의 호차 재배, 죽곡리 소재 백아 선생 유적지 정비 등의 후속 사업들도 속히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청정 백두대간 기슭의 우리 함양에서 재배된 작설차가 전국의 차인들에 큰 반향을 일으킬 날을 고대하며 글을 맺는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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