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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전에도, 오늘날에도… ‘평화는 정의의 결과’

이영철 기자
승인 2016.10.17 14:51
호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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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질은 사랑·정의·평화

작은 종교모임이 사회 변화시켜”

라틴어 원문 국내 최초 번역

지리산 자락서 부부농부로 살아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 교무님, 스님들이 산청 심적사에서 ‘정의’에 대해 논했다. 성염 전 주교황청 대사의 인터뷰 모습. <성하훈 기자>

“인간의 본질은 사랑이며, 개인이든 인류집단이든 사회적인 사랑을 하면 구원받고 사사로운 사랑으로 멸망한다는 경고는 철학적 탐구를 통해야 가능합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라틴어 원서를 완역한 성염(75) 주교황청 대사(2003~2007년)는 아우구스티누스(354~418) 자서전 <고백록>을 번역하면서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1986년 로마 교황청립 살레시안대에서 라틴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외국어대와 서강대에서 철학과 교수로도 활동했다.

성 전 대사가 번역한 <고백록>은 위대한 사상가의 자서전이자, 고중세의 대표적인 ‘실존철학서’로 평가받는다. 단순히 그리스도교 종교서적이 아니라 세계문학전집의 필수 도서로도 꼽히는 문화유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0여 권의 번역본이 출간됐지만, 모두 영어와 스페인어 등의 책을 번역한 것이다. 라틴어 원문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완역된 것이다.

성 전 대사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회적인 사랑만 하느님의 나라에 속한다고 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그는 1600여 년 전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라고 가르쳐 왔다”며 “사회적 사랑을 강조하고 정의와 평화를 이야기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제대로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한 연설에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이며, 정의는 우리가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을 통해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라고 했듯 두 분의 말씀이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성 전 대사를 만난 지난달 25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6주년이 되는 해로 산청 심적사에서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 교무님, 스님 등 종교인들과 일반인 200여명이 모여 ‘지리산생명평화기도회’를 열며 평화와 정의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용기 내는 시간이었다.

성 전 대사는 지난 2007년부터 함양 휴천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고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번역 중이다.

다음은 성염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와 나눈 일문일답.

- 고향이 전남 장성인데 어떻게 지리산과 인연을 가지게 됐나.

“20년 전에 귀농한 카톨릭농민회장 정용우 형제를 보러 함양에 들렀다가, 지리산이 좋아 1995년 집을 짓고 방학 때는 문정리에 내려와서 지내곤 했다. 바티칸을 떠나온 2007년에 본격적으로 함양에 둥지를 틀었다. 아래층에는 함양군 휴천면 문정공소 회장 정용우 토마스 가족이 살고 위층에는 우리 내외가 살고 있다.

- 텃밭 농사는 물론 배농사도 짓는다고 들었다. 힘들지는 않는지.

성염 전 주교황청 대사가 부인 전순란 여사와 함께 즐거운 저녁식사 시간을 갖고 있다.

“허허. 200평 남짓 되는 밭농사라 큰 힘이 들지는 않는다. 배나무가 30그루 정도 있고. 그래도 농번기가 되면 정신없이 바쁘다. 양파도 캐고, 쇠스랑으로 긁어가며 감자도 캐다보면 어느새 하루가 가곤 한다. 이집 저집에서 심다 남은 씨감자를 얻어다 심은 것이 이렇게 많은 수확을 내는 것은 보면 자연은 정말 위대하다. 옆집 블루베리 농장은 예년에는 8월초까지 땄는데 올해는 7월 중순이면 거의 끝난다고 하니 한반도 기후도 이젠 많이 바뀌었다.”

- 라틴어 원문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완역됐다.

“방탕하게 살던 아우구스티누스는 33세 나이에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43세에 자기 생애의 도덕적, 사상적 방랑을 글로 옮겼다. <고백록> 전반부(1~10권)에서는 그리스도교로 회심하기까지의 생애를 회고했다. 수도자, 사제, 주교로 생활을 시작하면서 10권을 썼고, 후반부(11~13권)에서는 세계의 기원과 시간문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풀어냈다.”

- <고백록>의 주된 정신은 무엇이라고 보나.

“아우구스티누스는 1600년 전 ‘정의 없는 국가는 강도떼’라고 발언할 만큼 사회교리의 토대를 마련했다. 인간이란 그 자체가 실로 위대한 심연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이며, 개인이든 인류 집단이든 사회적인 사랑을 하면 구원받고 사사로운 사랑으로는 멸망한다는 경고는 철학적 탐구를 통해서 가능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아직도 읽히는 이유다.”

- 사회적인 사랑을 말씀하시는데,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사랑이다. 5세기 가톨릭의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사사로운 사랑’과 ‘사회적인 사랑’으로 구분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 형태의 모든 사랑은 사사로운 사랑이다. 그것을 넘어서려는 게 사회적인 사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회적인 사랑만 하느님의 나라에 속한다고 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사회적인 사랑은 곧 정치’라고 했다. 교황청은 이런 가르침에 따라 전 세계 그리스도인을 지도하고 있다.

-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달라.

“예수가 문둥병(한센병) 환자를 낫게 한 적이 있다. 문둥이를 만졌다는 이유로 부정 탔다고 몰았고 그래서 사람들 사는 마을에 못 들어갔다. 사제들은 지난 역사에서 문둥이라고 욕먹고 손가락질 당해온 사람들을 품어줬다. 문둥이 냄새가 나는 것을 자기들의 임무로 생각하고 있다. 문둥병도 서러운데 사회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을 돕다가 문둥이로 몰린다고 해서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그래야 한다.”

-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는 정의의 결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의 참뜻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손 놓고 있겠다는 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직무유기라고 했다. 종교가 정치를 하면 종교가 때가 탈까 걱정하겠지만 정치로 가난한 이들과 약자들을 구하는 일은 얌전하게 성당 안에 남아 있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 교무님, 스님들이 한 자리에 다 모이셨다.

“종교가 천당 가는 길만 가르쳐왔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종교적인 언어는 일반 대중들이 가장 순수하고 설득력 있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종교 인사들의 말이 중요하다. 외연의 확장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대는 우리도 모르게 변하고 있다. 종편방송은 기득권에 편승해 종일토록 방송하지만 선거 결과를 보면 언론에서 예측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외연의 확대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한 이런 모임들이 사회를 조금씩 변하게 하고 있다. 종교인들의 사회적인 사랑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언론도 거들어야 한다.

- 사랑하면 보이게 되는가.

“사랑하면 그 대상을 알게 된다. 사랑은 진리를 알게 해준다. 가난한 사람, 서민들, 사회적 약자에 시선을 두면 그 사회가 보인다. 정의, 평화, 진리, 공존은 사랑하면 보이게 되는 것들이다.”

- 바티칸에서 기억되는 에피소드와 보람은.

“2003년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하고,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한 3차 전쟁이 시작되자 전 세계 기자들이 모여 교황청은 북한 핵 문제 제재에 어떻게 동참할 것인지 물었다. 총무 추기경은 ‘바티칸은 문제에 대해 제재를 하는 곳이 아니라, 어떻게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라고 답변하자 일순 회견장이 조용해지면서 더는 질의를 못하고 침묵에 휩싸인 그 여운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제 임기 중 두 분 교황께서 공식석상에서 한반도와 북핵문제를 직접 언급하고 호소하신 것이 여섯 번이나 된다. 대한민국 대사로서 보람이 컸던 순간이다.

-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내가 진짜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내 마지막 순간까지 가지고 가고 싶다. 지금 들려주고 싶은 성경구절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오복음서 6:33)’ 이 말씀이야 말로 사회적 사랑을 실천하는 정의와 공의의 모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