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같이 쏟아지는 건 “민들레 꽃씨 같은 새벽종”이 아니고 이장님의 마을방송이다. “어휴, 웬수들! 잠 좀 자자!” 해도 소용없다. 마을 사람들이 거의 칠십 팔순 노인들이고 가는귀들이 먹어 행여 못 들었을까 두 번 세 번 반복하고 스피커 볼륨은 어찌 그리도 높은지.

더구나 오늘방송은 점빵 없는 마을로 찾아와 생필품을 파는 이동매장의 선전방송이다. “에~ 함양 농협 하나로마트에서 마을회관 앞에 이동매장을 열었습니다. 간장, 휴지, 설탕, 당면, 밀가루…”

뒤이어 이태마다 돌아오는 건강검진에 병원 가는 걸 잊고 사는 어르신들을 생각한다면서 대학병원들이 마을을 찾아와 검진차량을 세우고 종합 진단비를 거둬들이는 행사가 방송된다.

날이 더워지자 뽑고 나서 돌아서면 다시 자라 오르는 지심(地心)을 매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지난주엔 배나무 밑에 우엉을 심은 이랑에 풀을 뽑았는데 정작 우엉은 클까말까 고민 중이고 잡초는 기운껏 자라 오르는 판국이다. 텃밭 전장에서는 잡초는 백만 대군이고 풀매는 호미는 홀홀 단기(單騎)다. 휘둘고 찍고 뽑고 해댔더니 사흘째 침을 맞으러 다녀도 손목이 뭘 쥘 수도 없을 지경.

다행히 배나무 밑은 신선초와 참나물이 영토를 평정하여 풀 뽑는 일이 많이 줄었는데 오늘 드디어 미루네가 효소를 담그러 고것들을 모조리 베어가고 나니까 밭이 훤해졌다.

아침 일찍 이사야가 트럭으로 와서 신선초와 참나물을 베 나가고 나도 겸사겸사 내려가 봄내 노랑꽃을 보여준 돌갓을 낫으로 베어내면서 틈새에 자라 오른 풀을 맸다. 맞은편 이랑의 유채도 효소감으로 쓰이므로 보스코를 불러내려 베어내게 하였다. 오이와 토마토가 올라갈 지주대에 줄도 매게 했다. 이렇게 셋이서 일을 하니 점심때쯤 일이 대강 마무리 지어 이사야의 차에 싣고 보니 한 트럭이 다 된다.

점심때가 되어 콩나물밥을 하고 밭에서 뜯어온 부추와 상추로 겉절이를 하면서, 오전에 손님을 맞아야 한다던 미루가 생각나 전화로 불렀다. ‘귀요미’가 와서 넷이 먹으니 찬이 없지만 밥맛이 한결 돋는다.

마당에서 일을 하며 관찰하니 일층현관 지붕 틈새에 둥지를 마련한 딱새가 먹이를 물고 돌아와서는 자동차 위에서, 전선 위에서 서성거리며 딴전을 피운다. 제 둥지 있는 곳이 사람 눈에 띌 세라 우리 시선을 돌리느라 무진장 애를 쓰는 모성애가 안타까워 내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시늉을 하니까 그제야 기와틈새의 집으로 들어간다, 부리에는 아직도 벌레가 물려 있다.

저녁나절에는 뒤꼍에 내놓은 포인세티아를 분갈이했다.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휴천재 실내를 화려하고 붉게 수놓는 포인세티아. 끙끙, 텃밭에서 흙과 거름을 실어 올려 화분을 갈고 나니 날이 어두워졌다.

8시에야 저녁을 차려주면서 “여보, 아내가 이렇게 일손이 바쁘고 힘이 딸리면 남편이 저녁이라도 차려놓고 ‘여보 저녁 먹지.’하면 안 되나요?” 했더니만 오후 내내 책상에만 앉아 있던 남편은 생활성가의 한 구절을 흥얼거릴 뿐! “꿈속에서 깨어나라, 젊은이여! 그대 사명 깨달으라 젊은이여!”(성염 작사, 원선오 작곡 ‘한데 뭉쳐 일어나자’)

/글 전순란

지리산 휴천재 일기는 지난 2007년 주교황청 대사직에서 물러난 성염 전 대사의 부인 전순란 여사가 함양 휴천 문정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아 살면서 쓰기 시작한 글이다. 2009년 8월 19일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 올 6월 21일 2500꼭지를 돌파했으니 대단한 필력이다. 성염 전 대사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은 휴천재 일기(www.donbosco.pe.kr)를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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