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고유지명이 뭉개어진
1964년 칠선계곡 학술조사
전해오던 이름 담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작명해 ‘아쉬움’

문헌사료·구전에 등장한 이름
기록 토대로 제대로 부르는 게
산에 갖추어야 할 겸허한 자세

김종직 유두류록 ‘의론대’도
해석과 이름에 신중 기울여야

‘지리99’팀이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길을 탐방하고 있다. <사진: 지리99>

정복자에게 짓밟혔다 되살아난 지명

북아메리카, 즉 미국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알레스카에 있는 매킨니봉(Mt. Mechkinley)이었다. 우리에겐 아주 익숙한 이름인데,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 기록을 갖고 있던 고상돈 대장이 원정대를 이끌고 정상에 오른 후 하산하다가 추락사한 안타까운 기억 속의 봉우리다. 그런데 2015년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봉우리 이름을 데날리봉(Mt. Denali)로 변경하였다. 이후, 매킨니봉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대형 배낭의 상표로 유명한 데날리가 미국 최고봉의 이름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1867년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레스카를 사들인 후, 광산업자를 비롯하여 자본을 앞세운 사업가들이 건너가서 정복자처럼 개발사업을 벌였다. 1896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윌리엄 매킨리가 당선되자, 당시 최고봉 일대에서 사업을 벌였던 어느 탄광업자가 당선 축하 선물 삼아 최고봉의 이름을 매킨리봉으로 변경한 것이다. 엄연히 원주민들이 조상 대대로 불러오던 데날리봉 이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외국어이기 때문에 어감을 제대로 느낄 수는 없는데, 데날리란 원주민 언어로 ‘아주 높은 곳’ 혹은 ‘태양의 집’이란 뜻으로 언어의 순수한 기원과 원주민들의 정서를 담고 있는 골동품 같은 이름이었다. 지명의 주인은 곁에서 바라보고 불러주는 원주민인데, 정복자에 의해서 강제로 사라진 것이다.

그 이후, 이름의 회복을 위하여 백 년이 넘는 원주민들의 끈질긴 투쟁 끝에 2015년에야 공식적으로 데날리봉, 제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느낌으로 마음대로 바꾼 깊은골 지명

중산리에서 올라 칼바위 삼거리에서 장터목 쪽으로 올라가면 철다리 우측 골짝을 주민들은 ‘깊은골’ 혹은 심한 사투리로 ‘짚은골’이라 하여, 지리산길 지도에 ‘깊은골’로 표시해 놓은 이후 많은 산꾼들이 드나들게 되었다.

그런데, 십여년 전 젊은 여성 산꾼이 이곳을 다녀오면서 산행기에 ‘숨은골’이라 써 놓았다. 많은 주민들이 부르고 있고 ‘산청지명고’에도 깊은골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수정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느낌적 느낌으로 숨은골이 좋아 그렇게 부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이후 많은 남성 산꾼들이 깊은골을 산행하면서 맹목적으로 따라서 줄줄이 산행기에 숨은골이라 기록하였다. 그럴 때마다 지명의 왜곡을 막기 위하여 댓글로써 오랫동안 싸우다시피 하였다. 인기를 누리던 그 여성 산꾼이 언젠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는 아무도 더 이상 숨은골이라 하지 않았다.

지명의 주인은 바라보고 불러주는 주변 주민들이다. 지명이란 어느 순간에 전설처럼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부대끼며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라 가볍게 바뀔 수 없으며, 옛 사람들의 정서와 역사가 잘 담겨 있는 문화재와 같은 것이다. 깊은골을 어감상 느낌적으로 비슷하다고 숨은골이라 부를 수는 없다.

고유 지명 뭉개어진 칠선계곡 학술조사

1964년 11월 부산일보 주관으로 이루어진 ‘지리산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 및 학술조사’는 지리산 산악역사에 획기적인 행사였다. 죽음의 계곡으로 알려진 칠선계곡의 등반로 개척을 비롯하여 벌목업자들을 몰아내고 지리산 자연생태를 조사한 성과를 이루었다. 이때 개척단에 의해 칠선계곡의 주요 명소가 작명되어 붙여진 지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개척단 대장을 맡아 작명을 주도한 김경렬 선생은 보고서에 이렇게 전하고 있다.

“23개의 못 가운데서, 아래쪽에서 중간지점에 위치한 몇몇 못은 옥녀탕, 군선담, 선녀탕 등으로 명명했으며, 한 폭포는 부산일보의 이름을 따서 부일폭포로, 다음은 대륙산악회의 이름인 대륙폭포, 자일산악회의 자일폭포, 동아대산악부의 동아폭포 등 각 참가 단체의 명칭을 달아 주었다.”

이곳들은 지리산에서 손꼽을 명소들이라 옛날부터 산자락 주민들의 감성이 담겨 있는 이름들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두지터 지나 칠선계곡 초입에 있던 칠성동 마을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불러주는 향토색 짙은 지명이 있었을 것인데, 개척단은 이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임의로 혹은 즉흥적으로 작명하거나 전리품 나누듯 참가 단체명을 딴 이름을 작은 입간판에 써서 대못을 박아 붙여 놓음으로써 원주민들이 불러왔을 아련한 지명들은 영영 묻혀버렸다.

지리산 지명에 대한 ‘지리99’의 원칙

청이당터에서 수거한 옹기 조각.

지리산에 많은 명소가 있고 암자를 비롯하여 역사적 흔적이 남은 지명이 있으나 정리되지 못하여 ‘지리99’가 지리산 탐구에 역점을 두면서 지명을 찾아내어 지도에 표시하는 등 지리산 산꾼들에게 정보를 공유해왔다.

지명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존재를 입증할 만한 사료가 있어야 하기에, 선현들의 유산기나 군현지 등의 문헌사료에 명기되어 있거나 일종의 고고학 사료라 할 수 있는 지리산 자락 주민들을 통하여 오랜 세월 대대로 내려온 골동품 같은 구전에 명백하게 등장하는 지명을 찾는 데 주력하였다.

말하자면, 느낌적으로 혹은 뜬금없는 지명을 지어내어 붙이지는 않았다. 물론, 문헌사료나 구전을 통해서 발굴된 지명의 위치가 어디인지 비정(比定)은 경우에 따라서 최대한 합리적인 추론을 통할 수밖에 없기에 다양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500년전 아득한 옛날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한 지리99의 비정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점령군처럼 문헌사료나 구전에도 등장하지 않은 지명을 마음대로 지어 붙이지는 않았다. 지리산 앞에서 갖추어야 할 겸허한 자세다.

유두류록 해석 두고 뜬금없는 소림선방

어름터 독가.

최근에 유두류록 기록을 왜곡 해석하여 상내봉 아래 석굴을 소림선방이라 자의적으로 작명을 하고는 유두류록에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마천지역 유지들, 일부 언론사뿐만 아니라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까지 이끌고 안내산행을 하면서 소림산방을 설파하고 하고 있으니, 지역 유지들은 무협영화로 그 유명한 소림사와 연관된 지명이 지리산에도 있다 하니 무슨 꺼리 하나 생겼다고 솔깃하여 소란하다.

선방에 이름이 붙은 경우도 없거니와 더군다나 소림선방이란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전통사찰에는 유래가 없다. 소림사의 명성에 기대어 소림정사, 소림당으로 이름을 붙인 몇 사례도 모두 일제강점기 이후의 일이다.

그곳을 소림선방은커녕 수행승이 기거한 암자터라고 전하는 지역 주민은 아무도 없는데, 유두류록을 자의적으로 왜곡하여 점령군처럼 홀로 이름을 지어 열심히 퍼뜨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기행시 ‘의론대(議論臺)’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兩箇胡僧衲半肩(양개호승납반견)
승복을 어깨에 걸친 호승이

巖間指點小林禪(암간지점소림선)
바위 사이 소림의 선을 가리켜 말하네

불교에서 최고의 경지인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에 따라 종파가 여럿으로 나누어지는데, 교학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기존의 교종에 대항하여 6세기경 중국에서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참선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새로운 종파인 선종을 개창하였는데, ‘소림선(小林禪)’이란 선종의 종지를 이르는 의미이다.

즉, 호승 우타가 교학 수행이 아닌, 선종의 종지에 따라 석굴에서 참선 수행에 용맹정진했다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기행시 ‘의론대’에 등장하는 ‘소림선(小林禪)’은 ‘선종의 치열한 수행’을 의미하는 것이지 특정한 곳의 지명을 일컫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일부에서는 유두류기행시 ‘의론대’에 등장하는 ‘소림선(小林禪)’을 엉뚱하게 ‘소림선방(小林禪房)’으로 해석하여 달마가 면벽 수행했던 중국 소림사의 소림굴을 지리산에 옮겨 표현한 것이며, 의론대 건너편 상내봉 부근에 있는 자연석굴의 고유명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선, 유두류기행시에 등장하는 ‘소림선’이란 선종의 종지에 따라 치열하게 참선 수행에 정진했음을 표현한 것이지, 뜬금없는 방(房)자를 붙여 ‘선방’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다. 만약 소림사에 있었다는 달마의 수행처 토굴을 빗대어 표현하였다면 ‘소림선’ 대신에 칠언절구에도 맞출 수 있고 뜻도 명확한 ‘소림굴(小林窟)’이라 했을 것이다. 중국 소림사에도 ‘소림선방’은 없으며 달마대사가 참선했다는 석굴을 달마동(達摩洞)이라 할 뿐이다.

<유두류록>에는 다만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議論臺(의론대) 절벽 아래에 석굴이 있어 노숙(老宿) 우타(優陁)가 그곳에 기거하면서” 즉, 호승 우타의 주거처는 멀리 떨어져 있는 건너편 상내봉 부근이 아닌, 바로 의론대 절벽 아래 있는 석굴임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지금도 상내봉 아래 3~4곳을 비롯해 곳곳에 수행승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유두류록>에 우타의 주거처에 대하여 ‘의론대 절벽 아래’라고 위치를 명확하게 지정하고 있고, 의론대 아래 석굴인 선녀굴에 산재해 있는 다양한 시기의 와편들이 이곳이 우타의 수행처로 회자 되는 곳임을 증명하고 있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